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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지마가 거의 나오지 않는 우시시라입니다.

*사망요소, 약간의 고시시라 요소가 있습니다.

 

썩어가는 시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니, 그런 냄새를 맡은 것만 같았다. 이미 현지 관리인과 봉사자들에게도 충분히 현장에 대해 전해들은 상태였고 시작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구조 작업은 워낙 투입된 인원이 많아서인지 슬슬 마무리가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구더기가 득실득실해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오는 시체에서 나는 냄새 따위 자신이 맡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자신이 밟고 있는 건물 더미 아래에 잘기잘기 찢겨진 시체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구조 작업이 끝나간다고 해도 아직 구조대원에게 발견되지 못하고 신원여부조차 되지 못한 ‘사람’ 이 없을 리가 없었다.

 

 

“지긋지긋해......”

 

 

시라부는 마스크를 내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힘들고 고된 일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일의 난이도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이 인내와 체력을 더 갉아먹었다. 장갑을 다시 갈아 낀 카와니시가 감염으로 죽고 싶지 않다면 마스크나 쓰라는 소리에 시라부는 다시 마스크를 콧등 위까지 올리고 하던 일에 집중하려 애썼다.

 

 

모든 외신들이 주목하고 세계 각국에서 구호물품이 끊임없이 보내지고 있을 정도의 강한 지진이었다. 사실 규모 자체도 크긴 했지만 유독 이 지역에 큰 사상자와 피해를 남긴 것은 목재 건물로 인한 연쇄적 화재였다. 주민들이 먼저 개발을 거부하기도 전에 이미 그 지역 자체가 몇 백 년 전부터 이어져오는 전통적인 마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 이유이기도 했다. 나라에서도 개발을 권고하지 않고 마을 특유의 방식으로 사는 것을 존중해줄 만큼 평화롭고, 고요하게 사는 곳이었고 그러한 분위기를 부러워해 실제로 사는 곳을 옮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단 하루의 시간이 그들의 삶을 통째로 바꾸었다.

 

 

 

***

 

 

 

시라부 켄지로는 흔히 성공한 자의 표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이었다. 일본 내에서도 세 손가락에 드는 대학교 의대에 수석입학으로 들어간 것은 물론이거니와 학기 내내 만점에 가까운 학점으로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당연한 결과로 시라부는 모든 교수들에게 완벽한 평가를 받은 상태에서 수석졸업만을 남긴 전설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신은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고 했었나. 비정상에 가까울 정도로 공부에 끈질기고 독한 면모를 보인 시라부는 과내에서 그리 좋지 않은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야 곱상한 외모를 가진 수석입학생이라는 타이틀을 건 시라부에게 순수한 관심이든 이용해먹을 심산이든 흥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이들도 많았었다. 하지만 곧 누가 다가오든 차갑게 내쳐버리는 시라부의 태도에 대부분의 사람이 질려버렸고 끝까지 남아 있던 이들도 인간관계 따위 필요 없다는 식의 시라부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와달라고 했어? 뭐 빨아먹을 거라도 없나 기웃거린 건 너희면서 왜 이제 와서 난리들이야.”

“하? 뭘 기대했다고 실망이란 말을 하는 거지? 자기 멋대로 꿈에 빠져 희희낙락해놓고는 현실감각이 되살아나니까 이제 상황파악도 안 되나봐?”

 

 

그렇다면 동급생들에게만 이러한 태도를 가진 것이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자고로 대학이라고 하는 곳은 굳이 같은 과가 아니라 하더라도 한번 이어진 선후배의 관계가 사회에 나가서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경우를 만들었다. 더군다나 그 대학이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곳인데다가 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 이미 한 자리를 꿰차고 시작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 있는 과라고 한다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인 ‘이들’ 중 하나임이 분명함에도 시라부는 선배들과의 관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흔히 얄미운 태도로 또래들 사이에선 밉상이지만 선배들에겐 예쁨을 받는 여우같은 타입 또한 아니었다. 개강 첫날 넉살좋은 과대가 쏜다는 술자리를 가장 먼저 거절하고 빠져나온 이가 시라부였고 그런 시라부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겨 시비를 건 3학년들이 자신에게 폭력을 쓴 것처럼 보이도록 유도해 휴학하게 만든 것은 시라부가 입학하고 나서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그 뒤로 시라부는 일명 아싸가 되었다. 본인이 자초한 것인데다가 그 본인도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또 다른 일들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학업에만 열중하는 모습이 소

문에 더욱 악영향을 미쳤다. 그나마 이야기하는 상대 또한 중학교 동창이라던 카와니시 타이치 뿐이었고 학술과 관련이 없는 학교 행사는 일제히 참가 안하는 주제에 학업 성적은 보란 듯이 정점을 찍어 나갔다

 

 

 

조별 과제만 하더라도 남들과는 최소한의 접촉만을 가진 채 완벽한 결과를 가져가는 것이 다른 학생들에게는 고깝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

 

 

 

시라부는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카와니시도 바로 씻고 잔다며 옷을 챙겼지만 그도 지친 모양인지 잠시 침대 모서리에 걸쳐 앉았다. 작업에 막바지를 더해가는 듯 해야 할 일은 줄어들기는커녕 쌓여나가기만 했고 명문대 출신의 의료 봉사자라는 명칭에 걸맞게 여기저기 불려나가기만 바빴다. 대학교 2학년 때 상상을 초월하는 시험범위를 내기로 유명한 과목을 공부하기 위해 일주일 가까이 밤을 샜던 때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달팠다.

 

 

“씻지도 않고 그러면 침대 더러워진다. 안 그래도 죽을 고비 넘기는 생존자들한테 균이나 옮겨서 저승길 특급행 태워주고 싶어?”

“생존자는 무슨, 환자면 모를까. 이미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은 넘기고도 넘겼어. 우리가 이러기 시작한지가 2주가 다 되가. 삼일 전에 그 덩치 좋은 아저씨도 근처에 수원이 있어서 그나마 버텼던 거지, 보름이 가까이 되는 이 시점에서 생존자라고 있을 것 같아?”

 

 

의학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최우선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위생. 의사 본인의 위생을 더럽힌 채 몸도 약한 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그야말로 환자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삼는 카와니시였기에 아무리 힘든 상황이었어도 그걸 잠시라도 잊지 말라고 가볍게 건넨 말이었지만 곧이어 시라부가 유난히 날카롭게 던진 말이 가슴에 무겁게 와 닿았다. 그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생존자가 더 나올리는 없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2주를 넘는 시간 동안 끈질기게 버티고 버텨서 생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마을 건물의 구조가 복잡하지 않은 탓인지 생존자든 시체든 마을 주민의 수와 대강 떨어지고 있었고 이미 대부분의 지역도 탐색이 끝난 상태였다. 지금 구조 작업이 보름을 넘어가는 이 상황에서 그들은 더 이상 생존자 구조가 아닌 마지막 수습을 한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나라고 생존자가 더 나오기를 바라지 않는 건 아냐.”

 

 

몇 분간의 침묵이 흐른 뒤 시라부가 씹어뱉듯이 조용히 말했다.

 

 

“정말 기적이라는 게 있다면 아직 우리가 발견 못한 생존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걸 하는 건 우리가 아니잖아. 우리는 생존자를 살리는 거지 찾아다니는 게 아니야.”

“켄지로.”

“그리고 우린 어디까지나 봉사자로 온 거야. 잊었어? 우리가 의사가 되긴 하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지. 넌 졸업하기 전에 실전 경험을 쌓자고 해서 온 거고 지금 넌 여기 있어. 그러니까 네 처지를 생각해 타이치.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걸 하라고.”

 

 

말을 마친 시라부가 침대에서 일어나 카와니시에게 등을 보이며 욕실 문을 열었다.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은 카와니시가 일어나기도 전에 시라부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네가 구조대원이라도 돼서 사람들을 구해다 나를 게 아니라면 말이야.”

 

 

 

***

 

 

 

카와니시는 아직도 시라부를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사실 기억한다라기보다는 기억할 수 밖에 없다가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자신에게 상당히 강한, 자세히는 부정적인 인상을 남긴데다가 그 인상은 얼마 있지 않아 보기좋게 깨졌기 때문이다.

 

 

처음 시라부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당시 카와니시는 친화력이 좋지는 못해도 솔직하고 차분한 태도로 나름대로의 친구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반에서 눈에 띄거나 분위기를 주도하진 않지만 본인의 자리는 지키며 자기의 몫은 만들어가는 그런 위치. 그때의 카와니시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잘생기고 사교성 풍부한 신입생으로 유명했던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 날은 유독 날씨가 상쾌했다고 기억한다. 입학식 날 처음 가쿠란을 입고 학교에 나오기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 지나고 난 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몰려다니기 시작했고 카와니시도 그 중 하나가 되었다. 아이들은 대체로 활발한 심성을 가졌는지 혼자 머뭇거리는 카와니시에게도 다가와 말을 걸었고 곧 밥을 같이 먹자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수더분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때마침 개학하자마자 신입생들을 받기 위해 홍보에 열을 올린 각종 동아리들이 쉬지 않고 교실에 난입해 고함을 지르는 덕분에 웃음꽃이 피어났고 교실 분위기는 더욱 친밀해질 수 있었다. 낯선 환경에다가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그만큼 떨리면서도 설레는 감정을 가지는 것이 바로 신입생이라는 신분이었다.

 

 

그날도 카와니시는 그새 친해진 친구들과 밥을 먹기 위해 교실을 나서고 있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학교 급식의 실체 때문인지 많은 아이들이 도시락을 싸오거나 학교 근처에 있는 매점에서 밥을 때우곤 했다. 하지만 그날만은 급식으로 애플파이가 나온다는 이야기에 교실에 남아있는 아이 하나 없이 모두 달려 나갔고 평소 불평 없이 밥을 먹던 카와니시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교실 문을 닫고 바로 친구들 뒤를 따르려던 카와니시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무리에서 가장 끝에 서있던 친구가 그런 카와니시에게 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카와니시? 갑자기 왜 그래? 밥 안 먹어?"

"어? 어...... 입부 신청서 좀 내고 갈게! 먼저들 가있어!“

“지금 점심시간인데 체육관은 문 닫혀있을걸? 아니다, 연습하는 운동부들 때문에 열려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어차피 신청서는 이번 주 금요일까지 받으니까 아직 안 내도 상관없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말끝을 흐린 카와니시가 가방에서 꺼낸 입부 신청서를 손에 쥐었다. 얼마나 만지고 고쳐 썼는지 종이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래도 오늘부터 받는다고 했으니까 좀 일찍 내고 싶어서......”

“나 참. 난 네가 배구부 쓴다고 했을 때부터 약간 놀랐다니까. 아아, 나쁜 뜻이 아니라 그......뭐랄까. 운동할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거든, 처음 봤을 때. 특히 우리 학교에서 경쟁률이 제일 세다는 배구부라니 말이야. 아무튼 알았어. 천천히 가고 있을 테니까 빨리 따라와!!”

“응, 좀 있다가 갈게.”

 

 

친구가 교실에서 나가고 나서도 카와니시는 가방에서 신청서를 꺼내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운동할 이미지는 아니다’ 라, 항상 들어온 말이었다. 아직 중학교 1학년이라고 쳐도 카와니시는 또래보다 한 뼘 정도 작은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초등학생 때는 얼굴을 모르는 동급생에게 돈을 뜯긴 적도 있었고 키순으로 섰을 때는 앞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카와니시는 자신이 몇 번이나 지운 흔적이 남은 신청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체육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였다. 누가 보아도 운동할 것 같지 않은 자신이 배구부에 지원한 것은. 아무리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키가 중요하다는 배구부 코치의 방침에 따라 아래 학년보다 작은 자신은 지원조차 못했고 그나마 배구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학창시절 배구를 했었다던 작은 삼촌 덕분이었다. 전문적인 교육은 받지 못했더라도 타고난 센스 덕분에 실력이 상승하던 카와니시는 결국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이 되서야 배구부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 시간동안 몇 번 뛰지 못한 경기일지라도 코트에 섰던 감각만큼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었고 고작 1년 동안 지낸 동료들이었지만 마지막 경기에 지고 나서 다 같이 부둥켜 울었었다. 키가 크진 못하더라도 자기가 실력이 나쁘진 않다는 것을 증명해 부원들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배구를 하고 싶었다.

 

 

본관과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체육관을 향해 가던 카와니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급식소 근처에 다다랐다. 급식소에서 몇 분 더 걸어가면 체육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기대에 부푼 발걸음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카와니시의 뒤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몇 명의 남자아이들이 급식소로 앞 다투어 들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시라부, 빨리와!! 오늘 점심은 디저트가 애플파이란 말이야!!”

“너 또 늦게 오면 코즈메가 네 것까지 다 먹어버린댔어!! 늦게 오면 두고 간다?”

“나중에 왜 두고 가냐고 하지 말고 빨리 와!!”

 

 

다들 고만고만한 키에다 가쿠란을 목까지 단정하게 채운 것을 보아하니 그 아이들 또한 카와니시 같은 신입생으로 보였다. 그런데도 서로 대화하는 것만 누가 듣는다면 이미 만난 지 반년은 된 사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꽤 친해졌다고 생각한 카와니시네만 하더라도 아직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초등학교에서 올라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다가 다시 체육관으로 향하려는 카와니시는 갑자기 뒤에서 터져나오는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전의 남학생들과 꽤 떨어진 곳에 있는 한 남자아이가 카와니시 쪽으로 뛰어오더니 자신의 친구들이 있는 곳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나 입부 신청서 좀 내고 온다!! 코즈메한테 내 애플파이 먹으면 죽는다고 전해주고!! 그런 난 좀 이따가 갈게!!”

 

 

그렇게 소리치고는 자신을 지나친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상당히 예쁘장한 얼굴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흔한 또래 남자아이들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달리 하얀 피부에다가 큼직큼직한 눈을 가진 남학생이었다. 하지만 다른 것보다 카와니시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한눈에 보아도 앙증맞을 정도의 키였다.

 

 

‘나보다 작잖아?’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카와니시는 곧 그 남자아이가 체육관 쪽으로 달려갔음을 깨달았다. 학교가 큰 구조는 아닌지라 체육관은 두 건물밖에 없었고 지금 자신이 가려는 체육관과 다른 체육관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한마디로, 방금 그 작은 아이는 배구부에 지원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오늘을 마지막으로 생존자 수색을 하려고 합니다. 사실상 보름을 훨씬 넘긴 이 기간에 하는 것도 희망을 걸 수밖에 없지만......”

 

 

시라부는 자신들보다 조금 높은 계단 위에 서 있는 구조대원을 바라보았다. 봉사자랍시고 온 저희 몇 명보다도 퀭한 눈과 수척한 안색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생존자는 둘째 치고 저 사람을 먼저 살려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이 일이 끝나더라도 거의 쉬지도 못할 것이다. 구조작업을 모두 이끌고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었나.

 

 

‘움......수 있...... 그......다면......라.’

‘괜찮다. ......는 언제나......를.......’

‘......하다. ......해.’

 

 

“윽......”

 

 

시라부는 머리를 감싸며 죄어오는 환청과 고통에 잇새를 깨물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며 살다보면 사라지겠거니 생각한 이 기억은 아직도 자신을 떠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는 잊은 줄 알았는데, 난 당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하긴, 정말 벗어났다면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시라부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과대평가를 내린 것이 분명했다. 얼굴을 찌푸린 채 머리를 짚은 시라부를 힐끗 본 카와니시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어디 아파?”

“잠깐 머리만, 괜찮아.”

“오늘이 지나고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수습 작업을 펼칠 겁니다. 그동안은 생존자 여부 때문에 무너진 건물들도 제대로 치우지 못했으니까요. 따라서 의료 봉사자 분들은 오늘 모든 일과가 끝나면 며칠만 쉬셨다가 간단한 검사만 받으시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형식상의 박수가 끝나고 시라부를 비롯한 봉사자들은 제 위치로 돌아갔다. 말이 일과지 사실 생존자가 더 이상 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에 임시 병원이랍시고 지은 천막 안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으라는 소리였다. 그래도 언제 올지 모르는, 얼마나 죽음에 가까운지 살펴야하는 생존자를 맞이하며 가슴 졸이느니 이제 얼굴은 어느 정도 익숙한 환자들을 대하는 게 훨씬 더 편했다.

 

 

쓰러진 나무 기둥에 깔려 썩은 다리를 잘라낸 여성 환자의 상태를 보고 있던 시라부 옆에 누군가 의자를 끌어오더니 털썩 앉았다. 누군가 싶어 돌아본 시라부의 눈에는 한 달 반 넘는 시간 동안 자신들을 지도해주었던 전문 정형외과 의료진인 오히라 레온이 보였다. 레온을 보자마자 황급히 일어나려는 시라부의 어깨를 잡아 눌러 앉힌 레온은 피로에 젖은 얼굴로 가볍게 웃었다.

 

 

“2주 동안 고생했어. 시라부 군.”

“제가 고생한 게 뭐가 있습니까. 저야 그저 환자들 한 둘 더 챙길 수 있었다지만 오히라 선생님이야말로......”

“그 환자 한 둘이 자네가 살린 건지도 모른다고? 자네가 한 일에 너무 자신을 잃지 말게. 내가 보기엔 자넨 실력도 재능도 충분히 넘치는 사람이야.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데도 말이야.”

“......그렇습니까.”

 

 

레온의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있던 시라부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왠지 모르게 그 눈 속에 단단한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저, 선생님. 그렇다면 잠시 무엇 하나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응? 나한테?”

“예.”

 

 

그동안 시라부와의 대화에서 시라부가 하는 거라곤 대답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먼저 질문을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사실 대화라기도 하기 뭐한 것이 첫눈에 봐도 실력은 좋지만 대인관계는 서툰 시라부에게 흥미가 생겨서 한 번 말을 걸어보았던 것인데 예, 아니오, 그렇습니까-하는 상투적인 대답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이 생각보다 중독성이 있어서 아무 말이나 건넨 적도 있었기에 레온은 시라부의 입에서 나올 질문이 나올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이지, 시라부 군. 궁금한 게 있음 언제라도 물어봐도 돼.”

 

 

레온의 가벼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시라부는 어딘가 말하기 불편한 듯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무거운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던 레온은 이내 그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이미 자신 스스로가 결정하고 다짐한 일에 조언도 평가도 아닌 형식적인 대답만을 원하고 있음을. 평소 다른 이와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어떤 말을 하든 곱씹고 말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조금 기다려야지-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지금 시라부의 표정은 처음 보는 것임에 분명했다. 그저 가벼운 질문이겠거니 생각한 레온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입을 여는 시라부를 비웃듯이 허공을 가르는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생존자 발견했답니다!!!!”

 

 

 

***

 

 

 

생존자는 모두의 예상을 갈아엎은 채 발견되었다. 건장한 성인 남자조차 죄다 시체로 발견된 상황에서 고작 8살 남짓한 남자아이가 눈물콧물이 얼굴에 잔뜩 말라붙은 채 건물 사이에 껴있었다고 한다. 천운인지 깔린 건물 사이에서 아이는 용케 부상이 적은 편이었고 아이가 있던 곳 근처에 물탱크가 터져서 영양실조만 있었을 뿐 탈수 증상은 없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 상황까지 와서 생존자라니, 살다 살다 기적이란 걸 처음 보네.”

“내가 이 일을 한지 30년이 넘어가는 데 나도 이런 건 처음 본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그것도 저런 꼬맹이가.”

 

 

2주를 넘는 시간 동안 생존자를 찾는 소리에 반응하지 못했던 건 아마도 오랜 시간 기절해 있다가 깨어나면서 극도의 공포로 말을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구조할 수 있었냐 한다면 울음소리도 아니고 노랫소리도 아닌 괴상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고 한다. 뭔 소린가 싶어 소리를 따라간 구조대원이 그것이 사람의 소리인 것을 깨닫고 바로 다른 구조대원들을 불러 모아 꽤 깊숙하게 묻힌 아이를 빼낼 수 있었는데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목을 긁는 소리를 내던 아이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고 구조대원은 당시 상황을 말했다.

 

 

“현재 신체적인 부상보다는 정신적 충격이 더 커 보이는 상황입니다. 때문에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각별한 주의 부탁드리고 깨어나는 대로 막사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기자들이 몰려들기 딱 좋은 상황이니까요.”

 

 

레온이 다른 의료진들과 봉사자들에게 주의시키는 말을 들으며 시라부는 천막 가장자리에 있는 침대에 눕혀진 아이를 바라보았다. 응급처치만을 마치고 다시 잠든 아이는 한눈에 보아도 유치원에 다닐 법한 나이였고 오랜 시간 동안 물만을 섭취한 탓인지 작은 몸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실종자로 처리된 마을 주민 중에서 이 나이대의 주민은 더 이상 없었고 때문에 이름이나 나이, 사는 곳이 어딘지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이 마을에 잠시 관광 온 가정의 아이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불쌍한 아이네. 기껏 구조됐는데 누군지도 아직 모르고.”

“......”

“만약 끝까지 알아내지 못한다면 결국 고아원으로 가야할지도 모르니까.”

“......그럴지도.”

 

 

카와니시의 말에 대충 대답한 시라부는 다시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먼지와 흙투성이가 된 검은색 머리를 감싼 붕대는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크고 무겁게 보였다. 한 손이 아니라 한 손가락에 잡히고도 남을 뼈만 튀어나온 팔목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있었고 다리를 다친 것인지 발목부터 무릎까지 하얀 거즈로 돌돌 말려있었다. 죽거나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하는 사람들보다는 백배는 나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라부는 왠지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자신 또한 기적을 바랬었던 사람이었지만 이 아이의 생존을 기적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시라부는 어렸을 때부터 잘 웃던 밝은 아이였다. 그건 태어났을 때부터였는지 갓난아이가 마주치는 사람마다 방긋거렸다고 시라부의 어머니는 곧잘 이야기하곤 하셨다.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홀어머니와 사는 탓인지 어릴 때부터 침착하고 성숙한 면모를 보여 주변 어른들에게도 귀여움을 받았고 특유의 다정하고 밝은 에너지로 시라부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넘쳐 났었다. 그 또래 아이들이 흔히 겪는다는 ‘학교 가기 싫어’라든가 ‘개학하기 싫어’ 같이 학교를 가기 싫어하는 모습은 보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새 학년이 되거나 개학이 다가올 때마다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며 해맑게 기뻐하던 아이였다.

 

 

그리고 시라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사고가 일어났다. 전국을 발칵 뒤흔들었던 지진이라고 했다. 규모도 지금까지의 지진 중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 만큼 크다고 했고 해안 지방에는 쓰나미까지 일어나 사상자가 끝이 없다고 했다. 다행이라도 해야 할지 시라부가 살던 지역은 내륙 지방 한가운데여서 쓰나미의 피해는 없었지만 하필 진앙에 가장 가까운 지역인 탓이라 피해가 상당했다. 그리고 시라부가 살던 마을은 산사태까지 겹쳐서 일어난 최악의 상황을 마주했다.

 

 

지진이 일어나자마자 어머니와 함께 식탁 밑으로 숨은 시라부였다. 휴일이라 같이 함께 점심이나 먹으며 어디를 놀러가나하는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지진은 행복한 한 가정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엄마, 언제 끝나는 거야? 나 무서워. 집이 무너질 것 같아.”

“우리 켄지로, 착하지? 조금만 더 힘내자. 조금 있으면 끝날 거야, 응? 그리고나서 엄마 손 잡고 파르페 먹으러 가자. 알았지?”

 

 

아무리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하다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학교에서 매달 지진 예비 훈련을 받았지만 작게 흔들리고 금방 지나가는 지진과 달리 집 천장이 흔들리는 지진을 겪은 아이는 공포에 질렸고 어머니는 그런 아이를 달래기 위해 애를 쓰셨다. 하지만 금방 지나가리라는 어머니의 희망과는 달리 이리저리 위태롭게 휘청이던 집은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이내 시라부 모자를 덮쳤다. 그리고 극도의 공포로 식탁 밑에서 뛰쳐나와 문을 향해 기어나가던 시라부를 향해 무너지는 철재는 시라부를 감싸기 위해 식탁을 밀치고 나온 어머니를 무참히 깔았다. 문 옆의 무거운 탁자 밑에 자리 잡은 시라부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식탁 주변에는 이미 천장에서 떨어진 녹슨 철재만이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다.

 

 

“엄마......?”

 

 

대답은 없었다. 이미 십 분은 족히 넘었다고 여길 시간이었지만 실제로 이제 갓 20초를 넘긴 시점이었다. 아이의 겁먹은 물음에 답하듯 다시 강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고 이어서 벽에 금이 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겁에 질려 울음이 터뜨린 시라부의 소리를 지우고자 하는 건지 그 따스했던 공간인 집은 갈수록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고 시라부가 있던 벽면도 무너지면서 탁자를 밀어 넘어뜨렸다. 얼떨결에 그 밑에 있던 시라부도 같이 밀려 탁자 밑으로 넘어졌고 그 순간과 동시에 시라부가 있던 곳에 수많은 벽돌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엄......흐어엉....... 엄마아아.......엄마 일어나아아...... 일어나란 말이야아아......”

 

 

그 광경을 본 시라부는 더욱 서럽게 울음을 토해냈다. ‘죽을 수 있다’라는 감정보다 시라부를 두렵게 만드는 건 대답 없는 엄마와 무너지는 집이었다. 엄마는 왜 대답이 없어라는 생각만 할 뿐 엄마가 죽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9살 아이에게 엄마란 죽지 않는 존재였다.

 

 

시라부의 울음소리가 길어질수록 지진의 강도는 이제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울다가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시라부는 히끅거리며 탁자 사이를 빠져나와 식탁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본진보다도 여진이 강하며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지진이 시작하고나서 시라부의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지금 시라부에게는 오직 ‘왜 엄마가 대답을 하지 않지’ 라는 질문의 대답만이 필요했다.

 

 

“엄마......? 왜 대답이 없어? 엄마......?”

 

 

이내 식탁 주변까지 가까이 간 시라부가 울먹거리는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이 있을 리는 없었고 식탁은 온갖 철재가 잔뜩 있어 위험함에도 시라부는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자마자 유리창이 산산조각나 바닥으로 떨어진 유리조각을 발에 박힌 시라부는 다시 엉엉 울면서도 절뚝거리며 식탁 바로 앞에 섰다. 철재를 들어보려는 시라부의 노력은 택도 없었고 훌쩍거리며 식탁 밑을 보기 위해 몸을 숙인 시라부는 눈을 돌리지도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시라부의 눈앞에는 철재에 몸이 관통당한 고통 때문에 눈도 감지 못한 어머니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웅덩이가 있었다.

 

 

 

***

 

 

 

시라부는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을 뜬 채로 집중하는 일을 오래 했는지 눈이 금세 따가워지는 증상이 생긴 것 같았다. 가끔 들어오는 보조 일을 제외하면 이제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갈 일을 없었기에 시라부를 포함한 다른 봉사자들은 비교적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시라부는 따로 쓰고 있는 시간이 있었다.

 

 

“켄지로. 오늘도 가?”

“어.”

 

 

짧게 대답하고는 숙소에서 나가기 전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시라부였다. 옆에서 카와니시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무시하고 마지막으로 목깃을 접은 뒤 숙소를 나가기 위해 문을 여는 시라부의 뒤에서 카와니시가 조용히, 하지만 강하게 일침을 가했다.

 

 

“그 아이는 네가 아냐, 켄지로.”

 

 

그 말에 멈칫하던 시라부가 평소보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그 탓에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시끄럽게 울리는 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카와니시였다.

 

 

숙소에서 나와 씩씩대며 걷기 시작한 시라부는 지금 자신이 왜 이러는지 도저히 모를 것 같았다. 머리로는 지금 자신이 어디를 가는지, 누구에게 가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다 알고 있었지만 왜 하려고 하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카와니시가 한 말이 그 답을 더 파헤치는 것 같았기에 마음이 더더욱 무거워졌다.

 

 

카와니시가 말한 것처럼 시라부는 지금 가장 마지막으로 구조된 생존자 아이, 고시키 츠토무에게 가는 길이었다. 깨어나자마자 두려움에 떨던 아이는 이름을 묻는 말에 그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의사의 주머니에 있던 수첩과 볼펜을 가져가고는 삐뚤빼뚤 ‘고시키 츠토무’ 라는 이름을 적었다. 말을 거부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말로 묻고 글로 답하면서 아이에 대한 정보가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단, 고시키는 이 마을에 사는 아이가 맞았다. 구조 작업 첫날 발견된 마을 주민 고시키씨의 아들이라고 하는 아이의 증언을 토대로 생존자 조회를 해본 결과 고시키씨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 하나가 고시키 츠토무였다.

 

 

그리고 아이는 현재 9살, 초등학교 3학년이어야 할 나이였다. 기껏해야 6, 7살 정도겠지 생각한 것이 상당히 의외였다.

 

 

처음 고시키에게 간 날, 시라부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가득한 상태였다. 분명 일어나서 씻고 옷을 입은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는 환자들 중에서도 아이들이 머물고 있는 곳까지 와 있었고 그 중에서도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는 고시키에게 시선이 꽂혀 있는 상태였다. 침울해 보이는 고시키는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 챈 건지 시라부에게 천천히 눈길을 돌렸고 의문이 담긴 그 눈빛에 시라부는 잠시 당황했었다. 이미 아침에 영양수액을 맞고 붕대와 거즈를 새로 갈았으므로 자신에게 올 사람은 식사 담당자나 신원을 알아내기 위해 찾아오는 대원뿐일 텐데 난생 처음 나타나 자기를 보는 시라부의 존재가 낯설었을 것이다.

 

 

사실 고시키를 제외한다면 천막 안의 분위기는 나쁘지는 않았다. 처음 구조됐을 당시만 하더라도 부모님과 친구를 잃었다는 공포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이들은 이제는 희미한 웃음을 보일 만큼 서로 어울려 놀고 있었다. 물론 겉모습은 몰라도 속마음이야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임이 틀림없기에 정부에서 지원하는 정신적 치료를 받을 것이다.

 

 

시라부 자신도 그랬듯이-

 

 

잠시 머뭇거리던 시라부는 천천히 고시키에게로 걸어갔다. 시라부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움찔거리던 고시키는 시라부가 자신의 앞에 서자 경계어린 눈으로 시라부를 응시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망설이던 시라부를 무시하듯 고시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천막의 가장자리로 가 몸을 웅크리고 담요에 얼굴을 묻었다. 명백히 자신을 거부하는 모습에 시라부는 입술을 깨물고 천막을 나왔다. 그것이 고시키와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

 

 

 

시라부가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온통 캄캄했다. 더듬거리는 손에는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바닥이 만져졌고 움직이려고 했으나 몸 여기저기에서 오는 고통에 움직일 수 없었다. 기절하고 나서 한 차례 더 무너진 것인지 시라부의 몸은 묵직한 철재들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껴 있었고 먼지투성이 공기 때문에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가 않았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시라부는 새카만 눈앞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리저리 더듬거리는 손에 무언가가 닿았음을 느꼈다.

 

 

뭔가 싶어 계속 더듬대던 손이 이내 그 물체를 잡았고 그것이 싸늘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촉감을 가진 것임을 알고 시라부의 체온이 차갑게 식었다. 무엇임을 알자마자 더러운 것이라도 만졌다는 듯이 재빨리 손을 제자리에 두었고 그 상태로 가만히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지금 시간이 밤인 건지, 아니면 빛이 들어오지 못할 만큼 깊이 묻힌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 동안 쓰러져 있는지도 몰랐지만 정신이 들자마자 몰려오는 타는 목마름과 허기짐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주었다. 쓰러진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던 시라부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서서히 알게 되는 엄마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어두운 곳에 있다는 공포보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리 현상을 해결하고픈 욕망이 더 컸다.

 

 

잠시 눈을 깜박거리던 시라부는 몸을 살짝 일으켜보았다. 시라부의 체구가 워낙 작아서 그런지 최대한 몸을 웅크린다면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시커먼 눈앞은 적응되지 않았고 할 수 없이 시라부는 눈이 보이지 않는 채로 움직여보기로 했다.

 

 

사실 움직인다기보다 무작정 팔다리를 휘두른다는 것이 맞았다. 이미 엉망진창이 된 곳으로 갔다가 팔을 베이기도 했고 발을 잘못 뻗었다가 간신히 멈춰있던 철재를 건드려 발목이 부러지기도 했다. 그 전에 이미 여러 날카롭고 위험한 곳이 잔뜩 있는 바닥을 몸으로 기어 다녔으니 무사한 곳은 없다고 보는 것이 좋았다.

 

 

여기저기 찢어지는 고통을 참고 행동범위를 넓혀가던 시라부의 손에 페트병 하나가 간신히 닿았다. 아무렇게나 움직인 터라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몰라도 운 좋게도 부엌에 있는 냉장고 쪽으로 이동한 듯싶었다.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미친 듯이 손을 휘적거리던 시라부는 페트병 주둥이를 잡을 수 있었다. 덜덜 떨리는 작은 손으로 페트병 입구를 연 시라부는 그나마 고개를 편히 들 수 있는 방향으로 가 병 안에 있을 이물질을 목에 쏟아 넣었다.

 

 

그리고 병 안에서 나오는 무언가가 시라부의 입에 닿는 순간 시라부는 곧바로 헛구역질을 했다. 마른 먼지와 탁한 먼지에 메마른 목을 적셔줄 물을 원한 시라부의 바람과 달리, 시라부가 집었던 병에 담긴 것은 식초였다. 평소에 어떤 것을 사든 바로 병으로 옮겨놓는 버릇이 있던 어머니였다. 순간 혀에 닿는 역겨운 시큼함으로 위액이 나올 만큼 구역질을 하던 시라부는 숨이 진정되자마자 다시 입술을 깨물고 식초를 마시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이 마시고 있는 건 물이 아니었고 마시는 내내 올라오려는 구역질을 참아야했다. 그럼에도 시라부는 식초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시라부는 살고 싶었다.

 

 

***

 

 

 

두 번째 만남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사실 같이 있기까지 일주일도 되지 않는 시간이 남았기에 굳이 곧 헤어질, 신원도 확실하지 않은 아이 하나에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카와니시나 다른 봉사자들도 잠깐의 연민을 가졌을 뿐이지 크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고시키가 끝까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곳을 벗어나 가게 될 곳은 결정될 테고 아이의 삶은 그대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니 시라부도 그들처럼 신경을 쓰지 않으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행위를 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시라부가 천막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몸을 바짝 긴장시킨 고시키는 어제와 똑같은 태도를 취했고 여전히 시라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시라부가 고시키가 도망간 곳으로 다시 걸어갔다. 허리를 숙이며 시라부는 고시키와 눈을 맞추었다.

 

 

“안녕?”

 

 

처음 만났을 때 해야 할 말을 지금 하고 있다니, 약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말을 건네기 전에 인사라도 해야지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고 목소리를 듣자 고시키는 더욱 몸을 웅크리며 시라부를 응시했다. 겁먹고 두려움을 가진 아이에게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안타깝게도 시라부는 아동심리치료사가 아니라 의사를 지망하는 의대생이었다. 아이의 다친 다리는 도와 줄 수 있어도 상처받은 마음은 치료해 줄 수 없었다.

 

 

이젠 아예 대놓고 자신과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며 시라부는 입을 달싹거렸다. 애초에 무엇을 하러 온 것도 아니었고 자신에겐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능력이나 아이와 같이 놀 수 있는 장난감도 없었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봉사자야 그저 아이들 몸이나 살피러 왔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들여보낸 것 같았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다 가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었다.

 

 

“안녕, 고시키...... 아니, 츠토무. 이름 부르는 건 처음이네. 내 이름은 시라부 켄지로야. 잠깐 이야기 좀 하러 왔어.”

“......”

“형은 지금 대학생이야. 의사 선생님 되려고 공부하고 있어. 츠토무는 되고 싶은 거 있어? 경찰 아저씨라던가, 선생님 같은 거 말이야.”

“......”

“아직 없어?”

“......”

 

 

묵묵히 아래만을 쳐다보는 고시키를 보며 시라부는 이를 악물었다.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이대로 정적인 모습만 계속 보였다간 쫓겨나갈 것만 같아 간신히 말을 했던 것이었다. 살갑게 말을 이어나갈 자신도 상대방의 대답도 없었지만 아이가 조금이라도 반응해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카와니시처럼 무안한 상황에서도 매끄럽게 넘길 수 있는 능력은 ‘지금의’ 시라부에게는 없었다. 적어도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말이다. 순간 망설이던 시라부의 입에서 정말 뜬금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배구 해 본 적 있어?”

 

 

그리고 정말 의외로, 말을 걸었던 이후 처음으로 고시키가 반응을 보였다. 아주 작은 반응이었지만 배구라는 말을 듣자마자 시라부를 올려보았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손으로 뭔가를 쓰는 모습을 그렸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는 시라부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시라부의 손을 끌어다가 뭐라고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계속 보고 있다 보니 아이는 시라부의 손바닥에다 글자를 쓰고 있었다.

 

 

‘네.’

“진짜? 누가 가르쳐줬어?”

‘텐도 형이 가르쳐줬어요.’

“텐도 형? 동네에 사는 형이야?”

‘아니요. 우리 형이에요.’

“아, 이름이 텐도였구나.”

‘아니요. 성이 텐도에요. 이름은 사토리고요.’

 

 

처음으로 반응해주고 대답했다는 게 기뻤던 시라부는 아이의 말이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아이가 쓴 말을 이해하고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7살 때 우리 집에 들어온 형이에요. 아빠는 텐도 형이 자기 아들이라고 했어요.’

 

 

 

***

 

 

 

처음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물어보았다. 딱히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공원에서 자전거 연습을 도와주는 다른 아버지들을 보며 시라부는 저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엄마, 왜 난 아빠가 없어?’

 

 

똑바로 위를 올려다보며 또랑또랑하게 묻는 말에 잠시 멈칫한 어머니는 온화하게 웃으며 넘어지려는 자전거를 세워주셨다.

 

 

‘아빠가 우리 켄지로를 너무 사랑하셔서 하늘에서 지켜주려고 하시는 거란다.’

 

 

어릴 때부터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 시라부라 어머니의 얼굴에 진 그늘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그 그늘이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고밖에 여길 수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던 어머니에게 다가와 사랑과 아이를 안겨준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시라부는 알 수 없었다.

 

 

 

***

 

 

 

또다시 기절한 건지 눈앞이 저릿했다. 구토가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식초가 담긴 병을 비운 시라부는 선잠을 자다가 결국 속이 불타는 느낌에 한참동안 구역질을 했다. 간신히 마신 식초로 위가 상한건지 속은 계속 쓰리기만 했고 더 이상 토할 위액도 없자 이제는 숨도 쉬기가 어려웠다. 빈틈없이 꽉 막힌 곳에서 공기는 통하는 모양인지 그동안 부족한 산소라도 호흡할 수 있었지만 몸 상태가 악화되는 시라부에겐 그것도 이젠 힘겨워졌다.

 

 

더 이상 날을 세는 것도 무리였다. 처음 며칠, 그러니까 시라부가 체감한 하루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꼬여버렸기 때문에 그저 일어나면 낮, 잠이 오면 밤인 생활이 이어져왔다. 얼마 전 손톱이 나가는 것을 감수하고 간신히 잡은 병에 들어있던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은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던 시라부에게 한 줄기의 생명수가 되어주었고 바닥에 있던 크래커는 위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 제대로 된 사고도 불가능했다. 애초에 9살 아이가 극한의 상황에 떨어진 것 자체가 생존 가능성이 없었고 그 속에서 살기 위해 악을 쓰면 쓸수록 정신은 옳은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탈수 증상이 사라지면 극심한 허기가 몰려왔고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면 어느새 시간의 흐름을 잊고 눈을 뜬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생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라부의 정신은 피폐해졌다.

 

 

그래서 시라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점점 생각이 어두워지는 자신을 깨닫고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알고 있는 동요를 끊임없이 불렀다. 적어도 본인은 불렀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수분 보충이 되지 않고 상한 목은 아무리 말을 하려 해도 제대로 된 단어조차 내뱉기 어려웠고 가뭄에 갈라진 바닥처럼 쩍쩍 마른 혀는 입 속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시라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라부의 몸은 말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이제 움직일 기력도 체력도 없었고 그 사이 몸에 난 상처에서 조금씩 나온 피로 머리는 어지러웠다. 이제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는 상황에서 시라부의 생명도 꺼지고 있었다. 이제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 편안해지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었고 가만히 누운 상태에서 앞을 보던 시라부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점점 감기는 눈꺼풀을 방해하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그 소리는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다.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확인해 볼 힘도 없었던 시라부는 미동도 없이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죽을 상황에서 들려오는 환청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다르게 소리는 점점 커져가기만 했고 무언가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소리가 커져갈수록 숨은 더 쉬기 편해졌고 조금이나마 눈앞이 보일 만큼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거운 기계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시라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들어오는 빛의 양이 점점 많아지면서 눈이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시라부는 조금씩 보이는 파란 하늘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늘 사이에 갑자기 검은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하늘을 가리는 시커먼 인영에 시라부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사라지고 예쁜 하늘이나 더 보고 싶었다. 그런 시라부를 가만히 내려 보던 인영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움직일 수 있겠나?"

 

 

도리도리-

 

 

"그렇다면 내가 들고 가겠다. 잠시 동안만 참아라."

 

 

그렇게 말한 인영은 그대로 시라부를 번쩍 들었다. 투박한 손길이었지만 익숙한 듯 시라부를 든 자세는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위로 들려진 시라부는 당황했지만 곧 자신을 안아든 단단한 팔이 꽤 편하게 느껴져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이제 안전하다는 것을 인지한 몸이 노곤해져 슬슬 졸음이 왔고 옆에서 자신의 팔에 무언가를 꽂는 한 여자가 보였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진 시라부는 자신을 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오직 앞에 시선을 둔 채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시라부는 돌처럼 단단히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극도의 피곤함으로 눈이 감겨지는 와중에도 파란 하늘보다 계속 더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

 

 

 

시라부가 몇몇 말하기 좋아하는 마을 주민 생존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때 고시키씨는 상당히 바람기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츠토무를 낳고서도 정신은 못 차렸고 츠토무가 7살이 되던 해에 자기 아들이라며 다른 피가 섞인 아들을 데려온 모양이었다. 그 아들이 바로 츠토무가 말한 텐도 형이며 그 어머니도 유부녀인 상황에서 몇 년 전 츠토무의 아버지 사이에서 텐도를 가졌지만 몇 년이 지난 뒤 들통 나 이혼당하고 아이는 버리고 갔다고 했다.

 

 

그 때문에 텐도라는 아이는 고시키씨의 무관심 아래서 츠토무의 어머니에게 학대를 받았지만 츠토무와는 꽤 좋은 사이를 유지했던 것 같았다. 난생 처음 생긴 형의 존재에 츠토무는 어머니의 방해에도 살갑게 달라붙고 항상 외로웠을 텐도도 귀염성 있는 츠토무를 꽤나 아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좋던 형제는 지진으로 인해 헤어질 수밖에 없던 것일 테고.

 

 

"츠토무. 안녕?"

 

 

고시키에게 가기 시작한지 사흘이 지난 지금, 이제 시라부의 모습이 보이면 고시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직 환하게 반겨주거나 같이 말로 인사하지는 못해도, 시라부가 온 것을 알면 나름대로의 기쁨을 표현해주었다.

 

 

"오늘은 뭐하고 있었어?"

'배구공 가지고 애들이랑 놀았어요.'

"재밌었어?"

'네.'

 

 

사실 단순하고 재미없는 대화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시라부가 선물한 수첩과 연필을 아이는 소중하다는 듯이 품고 다녔고 배구에 흥미를 보인 아이를 본 순간부터 시라부는 가장 가까운 지방의 스포츠클럽에 가 배구공을 사왔다. 배구공을 들고 찾아온 시라부를 본 고시키의 눈은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한 발전이었다. 아이는 배구공을 만지면서 좋아했지만 가끔 혼자 있을 때 배구공을 만지며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면 형을 생각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아플 때가 있었다. 아이의 작은 정수리를 쓰다듬고 있던 시라부에게 고시키가 수첩을 내밀었다.

 

 

'그런데 있잖아요, 형.'

"응?"

'형은 배구를 언제부터 시작했어요?'

 

 

순간 고시키의 머리를 쓰다듬던 시라부의 손이 멈췄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고시키의 눈이 모든 것을 알고 물어보는 것처럼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뭐라 말해야 하나 망설이던 시라부가 작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배구는, 초등학생 때 처음 배웠어."

'우와, 엄청 일찍 시작했네요? 누구한테 배웠어요?'

"......"

'형?'

"......츠토무. 오늘 형이 몸이 좀 안 좋아서, 내일 얘기하자."

 

 

굳은 얼굴로 돌아서는 시라부를 보는 고시키의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곧 자신의 잠자리를 향해 달려간 고시키가 이부자리 위에 올려둔 배구공을 만지며 웃었다.

 

 

***

 

 

 

눈앞에 계속 무언가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도저히 입을 열지 않는 시라부에게 몇 명의 상담사들도 들렸고 극도로 허약해진 몸을 검사하기 위해 의사와 간호사들이 떼거지로 온 적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시라부의 죽어가는 몸 상태가 나아지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친인척도 안 계신다, 아버지는 아예 호적에 없다, 고아원이나 보낼 수밖에 없겠다 하는 말들이 시라부의 귀에서 윙윙 울렸다.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고 살갑게 묻는 직원들이었지만 어차피 결과는 고아원 한 곳 뿐이라는 걸 시라부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무엇을 묻든 시라부는 대답 한번, 고개 한번 까닥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았을 때 시라부는 10일 간 갇혀있었다고 했다. 때문에 세기의 기적이라며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무리로 와서 막아내느라 힘들었다는 등 높은 분이 직접 만나러 오려고 했다 취소됐다는 등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갔다.

 

 

구조되고 모든 상황이 정리된 뒤에 시라부는 정부 지원 하에 어린이 병동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 몸 상태가 회복되면 고아원으로 거처가 옮겨질 것이었다. 그것을 아는 시라부는 병동에서 아무리 간호사가 살갑게 말을 걸어도, 또래 친구들이 같이 놀자며 눈앞에 얼쩡거려도 대꾸 하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길 이주가 넘었다. 아직 체력이라든가 심폐 능력은 부족했지만 어린아이 특유의 능력인지 체외의 상처는 대부분 회복된 상태였다. 때문에 병원 내 관계자도 시라부가 이제 입원치료는 받지 않아도 여길 만큼 시라부가 나갈 일밖에 남지 않았고 말을 아예 하지 않던 시라부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것은 그로부터 이틀 정도 지난 주말이 된 날이었다.

 

 

그날도 시라부는 밥만 비우고 자리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에 맞춰 수액을 채우러 온 간호사가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말도 안 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켄지로, 아주 멋진 삼촌 계시더라? 왜 진작 말 안 했어?"

 

 

그게 뭔 소리냐고 묻는 듯한 시라부의 눈을 본 간호사가 입을 가리며 웃더니 시라부의 볼을 꼬집으며 병실을 나갔다. 나가자마자 들어오는 건 시라부를 구조해준 그때 그 돌 같은 남자였다. 눈이 커진 시라부를 묵묵히 쳐다보며 병실 침대 옆에 앉은 남자가 그때와 같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은 좀 괜찮나."

 

 

경계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 시라부를 본 남자는 다시 딱딱하게 대답했다.

 

 

"다행이군."

 

 

"혹시, 배구라는 운동을 한 적이 있나."

"......?"

 

 

뜬금없는 말을 하는 남자를 보며 시라부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와 살면서 배운 운동이라곤 자전거와 동네 친구들과 하던 축구뿐이었다. 초등학교 동아리에서 배구부가 있었던 것 같긴 했지만 큰 관심은 두지 않았다.

 

 

작지만 분명한 대답을 보이는 시라부를 보며 남자는 계속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배구를 했다. 내가 있던 배구부는 언제나 강호였고 특히 고등학생 때 있던 배구부는 전국에서 8손가락에 들었고 난 그곳에서 에이스였다. 하지만 부상으로 더 이상 배구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난 이 길을 택했다. 내 신체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지금도 가끔 시간 날 때마다 배구는 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자기 자랑에 가까운 말만 늘어놓는 남자였지만 시라부는 왠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목적도 이유도 모르는 말뿐이었건만 일말의 자만도 없는 남자의 말이 믿음직스럽게 다가왔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라부의 눈을 마주보며 남자가 마지막 말을 날렸다

 

 

"너도 하지 않겠나. 배운 적이 없다면 내가 가르쳐주겠다."

"......?"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이전보다 휘둥그레진 시라부의 얼굴을 보며 남자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사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네가 몸이 나을 때까지는 면회도 안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네 사정을 들었는데 갈 곳도 없다고 들었다. 그러니 나와 같이 갔으면 한다."

 

 

누가 듣더라도 바로 동의할 수 없는 말에 시라부는 이불 조각을 움켜쥐었다.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와서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는 통에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지금 이 손을 놓는다면 자신은 그대로 고아원에 가야할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것도 안다. 그렇기에 싫다고 해도 딱히 강요는 하지 않......"

"갈게요."

 

 

오랜 시간 말을 안 한 탓인지 목이 잠겨 웅얼거리는 대답이 나왔고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발음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똑바로 보는 시라부의 눈빛에 남자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입고 있던 옷의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메모지 하나를 꺼내 시라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가 정자로 적혀있었다.

 

 

"그렇다면 퇴원하면 이곳으로 연락하도록 해라. 그 동안 난 여러 절차를 밟고 있겠다."

"......"

"그럼 이만."

"......"

"? 뭐지?"

 

 

나가려는 우시지마의 옷깃을 붙잡은 시라부가 들릴 듯 말듯 한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

"? 이름 말인가. 내 이름은 우시지마 와카토시다."

 

 

그리고 며칠 뒤, 퇴원하는 시라부를 데려오기 위해 우시지마가 병원에 다시 왔을 때 시라부는 간호사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몇 년 전 우시지마가 화재 속에서 목숨 걸고 구했던 남자아이가 친인척을 모두 잃고 보내진 고아원에서 학대받고 얼마 있지 않아 죽은 적이 있었음을.

 

 

 

***

 

 

 

우시지마가 시라부를 데려온지 3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우시지마를 따라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 시라부는 그 지역의 초등학교에 전학 수속을 밟았고 사고로 인해 말수가 줄어있었던 성격은 다시 본래의 활달하고 밝은 심성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에야 한 집에 처음 만난 두 명, 그것도 30대가 넘는 성인 남성과 10살 남짓한 남자아이가 함께 산다는 어색함이 있었지만 시라부는 어린 나이에도 우시지마가 상당히 단순하고 말수가 많지는 않아도 성격은 올곧은 남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쁜 생활에도 불구하고 본인 나름대로 시라부에게 노력을 다하려는 우시지마였기에 둘의 한집살이는 참 기묘했다.

 

 

시간은 어느새 시라부가 중학교에 입학하기까지 흘렀다. 그때의 시라부는 배구를 가르쳐주겠다는 우시지마의 말을 그대로 따라 우시지마의 배구 교습을 받고 있었다. 우시지마의 직업 자체가 상당히 바빠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음에도 우시지마는 쉴 때마다 시라부에게 배구를 가르쳐주었고 처음 배우는 것임에도 시라부는 곧잘 따라왔다. 가끔 우시지마가 집으로 데려오는 세미 에이타는 우시지마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에다 배구부 동료였다는데 일방적으로 시라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라, 시라부. 안녕? 학교는 재미있었어?"

 

 

자신을 빤히 보다가 대놓고 무시하며 방으로 들어가는 시라부를 보며 세미는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아무리 자기가 마음이 안 든다 해도 그렇지, 얼굴 본지가 3년이 넘어가는데도 시라부는 세미에게 오직 쌀쌀한 태도만을 보였다.

 

 

"정말 귀엽지가 않네! 와카토시, 시라부는 언제쯤 나한테 형이라고 불러줄까?"

"? 형이 아니라 아저씨가 아닌가."

"......그냥 세미상이라고만 불러줘도 난 여한이 없을 것 같아."

 

 

방 안에서 숙제를 하던 시라부는 방문에다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친절함을 잃지 않는 시라부가 유일하게 좋지 않는 대접을 하는 것이 세미였다. 자기를 볼 때마다 바보같이 웃는 저 세미 에이타라는 사람은 갈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숙제를 하다 보니 시간은 훌쩍 갔고 어느새 세미가 간다며 나와서 인사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자기를 향해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세미에게 시라부는 딱딱한 표정으로 인사만 하고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내 세미가 간 것인지 방문을 열고 들어온 우시지마에게 시라부가 활짝 웃음을 보였다.

 

 

"우시지마상, 저 할 말이 있......"

"세미가 네가 형이라 불러 주지 않는다더군."

"네?"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는 면상을 떠올리며 시라부는 우시지마가 보지 못하는 방향으로 이를 바득 갈았다. 형은 무슨, 인사만 해주는 것도 감지덕지 여겨야 할 판에 바라는 것도 컸다. 하지만 다시 우시지마를 향해 웃음을 보인 시라부가 우시지마용 미소를 보이며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제가 아직 낯을 가려서요. 나중에 좀 더 친해지면 한 번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

"아, 그건 그렇고. 우시지마상. 저 중학교 부활동은 배구부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말을 마치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우시지마를 올려다보자 우시지마는 그저 묵묵하게 시라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것인지 시라부는 우시지마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 네가 하고 싶은 것에 내가 해야 할 말이 있는가?"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 배구부에 지원한다니,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배구부에 들어가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예."

 

 

다시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가 줄어드는 시라부의 정수리를 우시지마는 아무 말 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시라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괜찮다. 난 언제나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너를 떠나지 않을 테니까."

 

 

그대로 방을 나간 덕에 귀까지 빨갛게 물든 시라부의 얼굴을 우시지마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 날, 배구부에 입부 신청서를 내기 위해 신바람 나서 달려가던 시라부는 카와니시와 마주친 것이었다. 물론, 시라부는 카와니시를 만났다는 것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

 

 

 

어느덧 시라부가 고시키와 만난 지 일주일 가까이 지났다. 이제 봉사자들은 봉사단체에서 마련해준 비행기를 타고 각각 사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고 남은 아이들도 제 살 곳을 찾아 떠나야 했다.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가야 했기에 오늘이 고시키와 이야기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따로 정이 든 봉사자들이 있는지 여러 아이들이 울고 있었고 봉사자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나중에 또 연락하자며 자기 메일주소를 알려주고 있었다. 고시키는 말할 것도 없이 시라부의 손을 꼭 잡은 채 끅끅거리고 있었다.

 

 

"어딜 가든, 잘 먹고 씩씩하게 잘 지내야 해."

 

 

시라부가 무슨 말을 하든 눈물바람이 되버리는 고시키 덕분에 대화하는 시간보다 고시키를 달래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그런 고시키 때문에 쩔쩔매는 시라부의 뒤에서 카와니시는 이런 시라부 모습은 오랜만에 본다며 비웃고 있었다.

 

 

"아니 자꾸 울지 말고...... 네가 이러면 형이 떠나기가 힘들어지잖아."

 

 

울지 말라니까 더 우는 고시키를 보며 시라부는 진땀을 뺐다. 사실 같이 있던 기간이라곤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자기에게 무슨 정이 들었는지 고시키는 계속 울기만 했다. 아이들을 돌보던 직원도 당황하며 고시키를 달랬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고시키가 우는 모습이 마치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아 고시키의 등을 두드리던 시라부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

 

 

 

향냄새가 방 안에 퍼져 갔다. 검은 양복을 입은 시라부가 관 위에 놓인, 정면을 똑바로 보고 찍었을 우시지마의 영정사진을 무심하게 보고 있었다.

 

 

그저 다른 날과 똑같은 날이었다. 그날도 시라부는 코치를 간신히 설득해 들어간 배구부에서 저녁시간까지 연습을 하다 왔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혼자 밥을 해먹고 자기 전 숙제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다.

 

 

다만 자려고 불을 끄려다 온 집안을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수화기를 들었을 때 세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우시지마가 심하게 다쳤으니 지금 당장 병원으로 오라고.

 

 

그뒤로 자신이 어땠는지 기억이 없었다. 분명 세미의 말을 듣자마자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자기는 병원으로 향했을 것이다. 아마 그때 자신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돈도 갖고 오지 않고 탄 자신을 말없이 병원으로 데려다 준 것을 보면 꽤 꼴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착한 병원에서 세미가 말한 호실로 올라갔을 때 시라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옆에서 치료 먼저 받자며 시라부를 끌고 가려는 세미를 뿌리치고 시라부는 우시지마가 누워있는 침대로 말없이 다가갔다.

 

 

몸이 온통 끔찍한 화상으로 뒤덮인 우시지마가 산소 호흡기를 낀 채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사람의 상처에 잘 알지 못하는 시라부가 보아도 화상은 피부가 녹아내리게 만들 만큼 심한 정도였고 코와 입은 아예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눈을 떠보니 시라부는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고 오는 동안 발을 다쳤는지 치료가 되어 있었다. 침대 옆에는 착잡한 얼굴의 세미가 앉아 있었다.

 

 

"우시지마상은요? 내가 가야 돼요. 난 우시지마상한테 가야한단 말이에요."

"시라부, 가만히 있어. 지금 너도 다쳤으니까 우선 진정 좀 해."

"지금 그게 문제에요? 우시지마상이 저렇게 다쳤잖아, 누가 봐도 죽을지도 모를 정돈데 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어!!"

"시라부!!"

 

 

무작정 침대에 내려오려는 시라부의 어깨를 잡은 세미가 시라부의 얼굴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지려는 시라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세미는 힘주어 말했다.

 

 

"와카토시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으로 보여? 와카토시는 너 두고 안가, 못가는 놈이야. 그러니까 제발 진정 좀 해. 와카토시는 금방 일어날 수 있어."

 

 

발버둥치던 시라부가 잠잠해지자 세미는 병실 문을 닫고 나갔다. 세미 자신이 말하긴 했었지만 사실 우시지마는 지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깐 들린 우시지마의 병실에서 다급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우시지마씨? 지금 제 말 들립니까? 말할 수 있겠어요?"

"젠장, 혹시 거기 보호자분이십니까?"

 

 

우시지마를 둘러싼 침대 앞에 있던 의사 한명이 세미를 가리키며 물었다. 순간 멈칫하던 세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친구입니다. 보호자는 아니지만......"

"지금 보호자나 유가족이 계신다면 바로 모셔와 주세요. 지금 우시지마씨 상태가 위독합니다."

 

 

그렇게 말하곤 다시 병실로 뛰어 들어가는 의사들을 보며 세미가 발걸음을 돌려 다시 시라부가 있는 병실로 뛰어갔다. 멍하니 앉아 있는 시라부를 끌어다가 우시지마가 있는 병실로 집어넣었다.

 

 

"뭡니까? 갑자기......!"

"와카토시가 떠나진 않아. 그냥 잠시, 조금 오랜 여행 좀 하고 온다니까 마지막 말 좀 듣고 와라."

 

 

세미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병실에 들어간 시라부는 침대 앞까지 걸어갔다. 한눈에 봐도 호흡이 거친 상태였고 심박수도 거의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시라부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이제 '끝났다-'만을 연발하던 의사들도 자리를 비켜주었다. 한 발자국씩 다가간 시라부는 우시지마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시라부가 우시지마의 앞에 서자마자 거짓말같이 우시지마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술이 녹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을 텐데도 시라부는 우시지마가 뭐라 말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미안하다.......미안해......'

 

 

그렇게 입술을 움직이고 옆으로 입술을 벌린 채, 심박수가 멈춘 소리가 병실 안을 울렸다. 죽은 우시지마를 표정 없이 바라보던 시라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우시지마가 말을 마치고 나서 입술을 벌리려고 했던 것은, 아마 마지막으로 미소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

 

 

 

그 뒤로 시라부는 성격이 몰라보게 변하기 시작했다. 우시지마가 죽은 바로 다음 날, 시라부는 중학교를 자퇴하고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고 우시지마가 자기 몫으로 남긴 유산을 최소한으로만 활용하면서 살았다. 가끔 시라부가 어떻게 사나 살피러 온 세미도 시라부가 상당히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혼자 공부에만 미쳐 살던 시라부는 바로 고등학교졸업시험을 본 뒤 대학에 입학했다. 우시지마가 죽기 전만 하더라도 배구선수가 돼서 같은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은 바뀐 상태였다. 몇 년 간 혼자 생활하던 시라부는 예전의 사교성은 잃은 모습이었고 대학에서도 공부만 하느라 다른 사람 신경쓸 여유는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같은 대학에서 카와니시를 만나 그나마 사람과 대화라는 걸 할 수 있었고 카와니시가 같이 가지 않겠냐며 물어본 봉사자 모집을 알았을 때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자신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까 생각했지만 지진에서 엄마를 잃었던 경험보다 병원에서 우시지마가 죽었을 때가 자신에게 더 큰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지진으로 엉망이 된 곳에서 생존자들과 환자를 돌보면서 시라부는 어떤 불안함이든 느끼지 못했다. 처음 마음이 동요했던 건 딱 한번, 고시키를 만났을 때였다. 그리고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치 어릴 때 자신 같아서-

 

 

***

 

 

 

갑자기 몸이 굳은 시라부를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고시키가 시라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눈물로 퉁퉁 부은 이 얼굴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우시지마가 죽고 나서 매일 혼자 씻으며 울던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시라부가 할 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을 보며 다시 대성통곡하려는 고시키를 보며 시라부는 부드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난 당신을 따라갈 수밖에 없나 보다.

 

 

"츠토무, 배구 계속 하지 않을래? 내가 가르쳐줄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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