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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하얗게 얼어 오들오들 떨던 계절이 지나, 세상에 분홍빛이 감돌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벚꽃나무가 가지를 살랑살랑 흔들던 시간이 지나 이젠 금방이라도 병아리가 걸어다닐듯한 개나리와 진분홍과 새빨강이 예쁘게 조화를 이루는 진달래가 피기 시작했다. 시라부는 가게 옆에 있던 빗자루를 들어 앞에 떨어진 벚꽃의 눈물들을 모두 쓸어내기 시작하였다.

우시지마가 졸업한 후, 시라부는 배구를 관뒀다. 우시지마와 같은 스파이커가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 아마도 우시지마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라부는 어느순간부터 우시지마에게 사랑이란 씨를 흩날렸고, 그것은 부활동 선후배라는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그만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 후, 시라토리자와가 카라스노에게 패배한 뒤 우시지마는 그렇게 학교를 졸업했다. 시라부는 우시지마가 졸업한 후부터 급격히 배구에 흥미를 잃었고, 학창시절의 마지막인 19살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시라부는 하루의 반을 전 날과 다름없이 재미없게 보낸 뒤 길을 걷다 꽃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게 앞에 놓여있는 수많은 화분 위에는 빨강, 분홍, 노랑, 보라, 주황, 하양, 파랑색의 갖가지 꽃들이 마치 우주를 그린듯 피어있었다. 시라부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시들어버린 꽃, 사랑을 알게 된 분홍색 꽃, 너무나도 좋아져버려 이젠 어떻게 해서든 사랑을 쟁취해야만 했던 빨간색 꽃. 그때부터였다. 시라부가 고등학생때의 자신처럼 꽃같은 사랑을 할 사람들에게 해야할 일을 알게 된 것. 시라부는 그렇게 5년동안 열심히 플로리스트가 되기위해 준비했고, 24살이라는 나이에 자신의 꽃집을 열 수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몇차례의 손님을 보내자 가게 안에 있는 빈티지한 뻐꾸기 시계는 벌써 점심을 알리고 있었다. 시라부는 가게 가운데에 놓여있는 나무 탁자에 앉아 앞치마를 바로 묶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빵집의 샌드위치를 꺼냈다. 한 입 베어물자 갖가지 야채들과 사이에 들어있던 참치가 옆에 놓여있는 향긋한 허브향과 함께 입안을 감싸돌았다. 시라부가 기분좋은듯한 웃음을 지으며 한 입 더 베어물려는 순간 문에 달려있던 종이 청아하게 울렸다. 시라부가 고개를 들자 눈 앞엔 익숙하던 냄새가 꽃향기와 섞여 시라부의 코를 아찔하게 찔렀다.

우시지마였다. 그렇게 시라부가 사랑했던,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마음에서 떠나보내야했던, 우시지마가 시라부의 눈 앞에 나타났다. 눈 앞에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해서 원하는 것마저 포기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보이니 시라부 마음속에 잠들어있던 분홍색 꽃이 다시 피어나려는 듯 했다. 우시지마는 시라부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고, 시라부도 우시지마에게 꺼낼 첫 마디를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장미의 가시로 가득 찼다. 5년간 못 본 사이 우시지마의 키는 더 커있는 듯 했고, 얼굴도 더이상 학생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시지마가 시라부에게 인사와 안부를 건내자 시라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가시들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사라져버렸다. 시라부는 간신히 우시지마에게 잘 있었다는 말과 함께 안부를 물어보았다. 항상 똑같지. 라는 대답이 들어오자 시라부의 온 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자신이 항상 챙겨주고, 슬프지만 제일 찬란했던 3년이 우시지마에겐 지금과 같다는 생각을 하니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우시지마는 시라부에게 요즘 어떤 꽃이 제일 유행이냐며 물었다. 시라부가 말을 더듬으며 파스텔 톤의 안개꽃을 보여주었다. 안개꽃은 하얀색부터 시작하여 분홍, 노랑, 하늘, 연보라, 연두색이 각 꽃병에 색별로 정리되어 꽂혀있었다. 우시지마가 안개꽃을 고르는 동안 시라부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제가 짝사랑을 한 것이었고, 운동만 하던 우시지마에게 관심 한 번을 바란 것도 아니지만 우시지마의 별 의미 없는 한마디에 시라부의 마음은 곧장 아까 시라부가 치웠던 벚꽃의 흔적처럼 바람 하나에 바닥으로 내리쳐진 것 같았다. 시라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안개꽃을 고르는 우시지마를 바라봤고, 여전히 그 아무 의미 없는 표정은 무언가의 뜻이라도 담겨있나 싶어 골똘히 생각에 빠지게 했다. 그때 우시지마가 시라부에게 분홍색 안개꽃을 건내며 이 색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시라부가 한창 꽃을 포장하며 도대체 우시지마가 이런 곳에 오고, 이런 예쁜 핑크빛의 안개꽃을 고른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한테 줄 이유는 없을 것처럼 보였고, 웃어른에게 줄 꽃도 아니었다. 꽃은 시라부가 추천했지만 눈치가 더럽게 없는 우시지마도 웃어른에게 이런 꽃을 선물해도 될거란 생각은 전혀 안할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추측 하나하나를 지워나가자 시라부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답변밖에 남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있을 거라는 것. 시라부가 남긴 이 답은 시라부의 뺨을 크게 내리치는 듯 했다. 정말 이 꽃이 우시지마의 여자친구를 위한 것이라면 당장이라도 가지를 모두 잘라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반응하나싶었고, 이제 자신은 우시지마의 추억속에서 단지 고등학생 우시지마가 인정한 세터로 밖에 안남아있을 거라는 것을 머릿속에 새겼다.

포장이 끝난 후 시라부는 우시지마에게 안개꽃이 예쁘게 포장된 꽃다발을 안겨주었고, 우시지마가 꽃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시라부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우시지마에게 여자친구가 참 좋아하겠다는 말을 하자 우시지마는 무슨소리냐는 듯이 시라부를 쳐다보았다. 시라부가 당연히 여자친구에게 주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자 우시지마는 곧 초등학교를 졸업할 여동생이 화려한 꽃다발은 싫어해서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한 겨울처럼 눈이 내려 얼어붙었던 시라부의 마음에 봄을 알리는 햇살이 들기 시작하였다. 우시지마가 포장을 예쁘게 잘했다며 여자였으면 인기 많았을 거라는 말과 함께 언젠가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끝내고 가게를 나가자 시라부는 다리의 힘이 풀린듯 그대로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이제 시라부의 마음은 더이상 1년 내내 겨울이 아니다. 언젠가 다시 오겠다는 우시지마의 말을 기억하며 시라부의 마음은 약속이란 싹을 틔우고, 추억이라는 열매를 맺으며 다시 만난 사랑이라는 꽃을 피워냈다. 그렇게 시라부의 슬프고 찬란했던 짝사랑이, 앞으로는 행복과 희망으로만 빛날 짝사랑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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