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계인 우시지마X탐사대원 시라부
시라부 켄지로가 이 행성에 불시착한 지 1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디까지나 이곳에서의 시간을 기준으로 잡은 것이었으므로, 지구에서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지는 모를 일이다. 인류가 새로이 살아갈 수 있는 행성을 찾아 헤매던 탐사대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행방을 찾을 수조차 없었다. 이곳 역시 태양과 같은 역할을 하는 항성이 존재했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떨어진 곳은 행성의 고위도 부근인지 낮의 길이가 무척 짧았다. 1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시라부가 이 행성에 대해 알아낸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숨을 쉴 수 있고, 물이 있고, 지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환경이라는 것.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인간과 비슷한 생명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일까. 낭패라면 낭패였다. 구명선에 있던 식량이 벌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터라, 다시는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대비해서라도 시라부는 식량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러나 근처에 널려 있는 풀을 캐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나 독초를 먹어버리는 바람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비명횡사해버리는 것은 너무 비참한 최후이므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얻은 것 하나 없이 구명선 안에서 잠을 청한 시라부가 정확히 여섯 시간의 취침 후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자연광에 눈을 뜬 아침이었다.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한 다음 구명선 밖으로 나갈 예정이었으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버려 시라부는 출입문까지 불과 세 걸음만을 남겨두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출입문에 달린 유리창 너머로 생명체가 보였다.
저와 똑같이 두 다리로 직립보행을 하는.
주변 탐사를 한다고 해봤자 혹시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몰라 고작 구명선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에 불과했을 뿐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시라부는 그동안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던 생명체가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긴장한 탓에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손에 땀이 났다. 문을 열었을 때, 저 생명체가 여기로 달려들어 자신을 공격할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진 않았지만 언제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마땅한 무기가 없어 유리창을 깰 때나 쓰는 작은 해머를 오른손에 쥔 시라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시라부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문밖으로 빼꼼 나오는 모습이 생명체의 시야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살짝 측면을 바라보다가 완전히 고개를 돌린 고등생물은,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시라부 앞에 도달해서야 그 걸음을 멈췄다.
남자인가? 외계생명체에도 우리처럼 성별을 나누는 기준이 있을까? 근데 지금 그런 걸 따져서 어디에 쓰지? 멀리서 본다 해도 이 생명체는 확실한 남자의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라부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외계생명체는, 그러니까 이 남자는 손가락을 뻗어 구명선을 가리킨 다음, 시라부를 가리켰다.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 것 같아 시라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같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 다음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저기에서 살고 있다는 뜻인가? 시라부가 멀뚱멀뚱 남자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시라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남자를 따라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혹시 죽어버리면 어쩌지. 불안감이 피어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시라부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잡아야만 할 것 같았다.
남자의 뒤를 따라가자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이 보였는데, 그들은 인간처럼 직립보행을 할 뿐만 아니라 사는 방식도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어,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하네. 분명 입은 있는데 입술 사이가 벌어지는 것은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말은 통하는 것 같고……. 저들만의 소통 방식이라도 있는 걸까. 시라부는 옛날 사람들이 SF영화를 볼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한참을 직진 방향으로 걷던 남자가 갑자기 왼쪽으로 꺾는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시라부는 남자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남자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시라부가 들어간 곳은 지구의 일반 가정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복도를 따라가면 차례대로 거실과 부엌이 나오는 구조. 이 남자가 사는 집이려나, 그런데 여기에 왜 날 데려왔지. 시라부는 남자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다. 우선 첫 번째로…… 잠깐, 그 전에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을까? 갑갑해진 마음에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였다.
네가 하는 생각이라면 계속 듣고 있었어.
머릿속에 가득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시라부는 화들짝 놀랐다. 어디에서 들려온 소리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라부의 머릿속에 한 번 더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에 너 말고 누가 더 있다고 생각해? 시라부는 그제야 남자를 쳐다봤고, 자신이 아직도 남자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네가 너무 꽉 잡고 있길래. 남자의 말(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에 시라부는 얼굴에 열이 오른 것 같았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게 뭐야. 시라부는 내치다시피 남자의 손을 놓았다. 글쎄, 내가 보기엔 넌 충분히 꼬맹이라서. 정정한다. 얼굴에 열이 오른 것 ‘같다’가 아닌, 명백하게 얼굴에 열이 오른 시라부는 결국 남자에게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내가 어딜 봐서 꼬맹이로 보인다는……. 문장의 90% 이상을 내뱉은 시라부는 문득 자신이 하는 짓이 영락없는 꼬맹이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쩐지 자꾸 저 남자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느낌이다.
이제 이 시답잖은 이야기는 그만두는 게 좋겠군. 넌 어디서 왔지? 방금 네 입에서 나온 언어는 처음 들어본다.
……지구.
여기와는 멀리 떨어져 있나?
상상도 못 할 만큼.
어쩌다가.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시라부도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원인 모를 고장 탓에 시라부와 함께 우주선에 탔던 대원들은 전부 구명선에 들어갔고, 마찬가지로 구명선에 들어간 시라부가 이리저리 우주를 떠돌다 눈을 떠 보니 이곳에 불시착해 있었을 뿐. 설상가상으로 통신기가 모조리 고장이 나는 바람에 다른 대원들의 행방마저도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당신, 이름이 뭐야?
와카토시.
성은 없어?
그게 뭐지?
이름 앞에 붙는 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너는 있나?
없는 게 이상한 거야, 우리한테는. ……시라부 켄지로. 시라부가 성이고 켄지로가 이름.
남자는, 와카토시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에겐 가족 개념이 없는 걸까. 하긴 마을을 둘러봤을 때 지구에 사는 인간들처럼 가족끼리 모여 사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러면 이름은 누가 지어줘? 내가 직접. 너는 네 이름을 직접 지은 게 아닌 모양이군. 응,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야. ……할아버지는 또 뭐냐니, 그런 질문하지 마. 어차피 지구에 갈 일 없잖아. 가족 개념이 없는 외계생명체에게 가족에 관해 설명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고, 시라부는 그런 것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건가?
당연하지. 날 왜 여기로 데려왔어?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
잠깐 얼굴을 마주한 그 짧은 사이에 내가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알아냈다고? 시라부는 질린 표정을 지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와카토시의 도움을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시라부는 이따금 지구에 있을 적의 꿈을 꿨다. 나오는 사람들은 주로 부모님이나 친구 중에서도 제일 친하게 지내던 카와니시였는데, 요즘에는 카와니시가 더 많이 나왔다. 너 꽃도 기르고 있었어? 진짜 의외네. 시라부는 자신이 지금 언제 있었던 일을 꿈으로 꾸고 있는 건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우주로 떠나기 정확히 2주 전이었다. 방금 그 말 좀 심했어, 시라부. 카와니시는 정말 상처받았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지만, 그런 게 시라부에게 통할 리 없었다. 길러봤자 귀찮기만 하잖아. 일일이 다 신경 써줘야 하고. 네가 꽃을 한 번도 안 길러봐서 그래.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막 새싹이 돋은 화분을 째려보던 시라부에게, 카와니시는 씨앗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심으면 알게 될 거야. 그 말을 들은 시라부가 인상을 팍 찌푸리자마자, 카와니시가 그런 표정 지을 줄 알았다며 뭔가 더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일어나, 시라부.
……더 자면 안 돼?
어림없다는 듯 시라부의 두 팔을 붙잡은 와카토시는 이런 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시라부를 들어 올렸다. (여기서 시라부는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세상모르고 쿨쿨 자더군. 어제 그렇게 피곤했나? 딱히 한 것도 없을 텐데. 그 말 그대로 시라부는 어제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구에서는 바쁘게 살았기 때문에 저절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부지런한 생활습관이, 불시착한 행성에서 보낸 고작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전부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시라부는 더더욱 와카토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자기 집에 살게 해 주는 대신 잡일 같은 거라도 시키는 게 평범한 거 아닌가? 그러나 와카토시는 시라부에게 일을 시키긴커녕 생사를 확인하고 식사를 챙겨 주는 것 이외에는 관심 자체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설마 날 애완동물 취급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이 행성에서는 동물을 집에서 기르지 않는다) 정말 그런 거라면 질색이다. ……그렇지만 시라부가 스스로 나서서 일하려고 해도 와카토시의 집은 언제나 깨끗하고 정리정돈이 잘 된 상태여서 오히려 건드리지 않는 게 더 나을 성싶었다.
그러고 보니 카와니시한테 받은 씨앗을 챙겨 왔던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라부는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뒤에서 와카토시가 자신을 부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을을 벗어나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수풀을 헤치고 구명선이 있는 곳에 겨우 도착한 시라부는 구명선의 출입구에 이름 모를 식물의 줄기가 달라붙어 있는 것을 떼어낸 다음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명선의 내부는 한 달 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와카토시를 따라 마을에 간 이후로 손을 댄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다 식량을 모아둔 상자 근처에서 작은 씨앗 하나를 발견한 시라부는 왔던 길 그대로 마을로 돌아갔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와카토시는 시라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딜 다녀왔냐는 질문에 시라부는 구명선, 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아, 그렇지. 시라부는 자신이 지구와 관련된 무언가를 들고 올 때만큼은 모든 것에 무심해 보이던 와카토시의 눈이 빛나곤 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와카토시가 시라부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지금과 같은 상황뿐이었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도 자신이 어디에 갔는지 눈치챘기 때문이 아닐까. 굳이 어딜 다녀온 거냐고 물어봤던 건 기대를 확신으로 바꾸기 위함에서였겠지.
특이하게도 이곳은 꽃 등을 비롯한 식물을 기르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존재하질 않았다. 따라서 와카토시의 집 역시 화분이 있을 리 만무했기에,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통에 흙을 퍼담은 시라부는 그것을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내려놓았다.
저건 뭐지?
씨앗. 아마 꽃이지 않을까.
위험할 수도 있지 않나?
설마, 친구한테서 받은 건데.
물을 너무 많이 주면 흙이 썩어버린다고 했었지. 머릿속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던 카와니시와의 대화에서 필수적인 정보를 집어 올린 시라부는 와카토시에게 분무기가 있냐고 물었다. 와카토시는 영문 모를 표정 반, 호기심 가득한 표정 반으로 창가 반대편에 위치한 테이블을 가리켰다. 안에 고여 있던 물을 버리고 새로 받은 물을 칙칙 뿌리자 흙이 조금 생기 있어 보였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저런 걸 키워서 어디에 써먹냐는 표정이네.
이젠 생각도 읽을 수 있게 됐나 보군.
생각 못 읽어도 그런 건 바로 알아차릴 수 있거든?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을 줄은…….
순간 할 말을 잃은 시라부는 손에 들고 있던 분무기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저런 말을 해? 관심은 개뿔. 웃기고 있네! 착각도 유분수지! 너한테 관심 가질 바에는 차라리 저 씨앗한테 더 관심 가지는 게 훨씬 낫겠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와카토시의 말을 전력으로 부정한 시라부가 문득 떠올린 것은, 와카토시가 한 말이 그렇게 썩 틀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상대적으로 와카토시가 자신에게 관심을 덜 가지는 거라 여기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좀…….
시라부, 얼굴이 빨개졌다. 혹시 열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거 아니니까 조용히 해.
씨앗을 안 들고 왔으면 일이 이렇게 흘러가지도 않았을 텐데. 시라부는 마른세수를 여러 번 했다. 얼굴에 오른 열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