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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라부 켄지로는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모아 붙였다. 두 개의 손가락으로 감싸고 있는 것은 백묵이나 다름없을 모양새였다. 희멀건 연기가 따라붙지 않는 까닭은 단지 끄트머리에 불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리 내.”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시라부가 담배를 입에 문다. 희고 곧고 기다란 모양이 입술에 비스듬히 걸쳐졌다가 입안으로 말려 들어간다. 막대 사탕을 깨무는 것처럼 필터를 씹으며 고집인지 도발인지 도통 모를 표정이었다.
  우시지마가 허리를 굽혔다. 손가락의 일부는 다문 잇새로 삐져나온 담배의 몸체를 잡았고 나머지는 시라부의 얼굴을 뒤덮듯 가린다. 말캉하게 온기를 품은 볼 옆쪽으로 날렵한 턱선과 약간은 경직된 근육과 불규칙한 맥박, 마른침을 삼키며 울렁이는 목젖을, 우시지마의 손가락이 더듬는다.
  “어서 뱉어.”  
  빳빳해진 눈썹으로 조금은 노기가 서린 음성을 뱉는다. 상기된 얼굴의 시라부가 순순히 입을 벌렸다. 타액이 묻어 번들거리는 담배 한 개비가 아랫입술에서 미끄러져 턱을 타고 떨어지기 전에 우시지마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말아 쥔다.
  “병원 내부에서는 금연이다.”
  “피우지 않았잖아요. 물고만 있는 것도 잘못인가요.”
  “그리고 너 아직 고등학생이지 않나.”
  “졸업식엔 못 갔지만 올해로 스물하나고요.” 한바탕 난리를 쳐놓은 주제에 태연하게 대꾸한다. “그런 걸 신경 쓰시다니 역시 모르겠어요. 선생님의 포인트.”
  시라부는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 온종일 센터에 갇혀있는 게 일인 주제에 금지 물품을 들여온 것도 놀랍지 않았다. 화재경보도 살수장치도 작동되지 않았다는 곁가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정말로 피울 생각이었다면 이미 불씨를 댕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금의 해프닝은 어떤 메시지에 불과할 테다.
  산뜻한 색상의 커튼 아래로 가습기가 수증기를 뿜어냈다. 기체는 섬세하고도 기괴하게 비틀린 소나무 분재를 휘감았다가 점점 옅어지는 밀도로 공기에 완전하게 녹아든다. 음량을 줄인 TV에서 패널들의 웃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대개 병실의 경제적 가치는 환자의 재력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호텔이나 다름없는 실내 구조는 이곳이 1인실임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호화롭다. 별반 물욕이 없어 뵈던 원장마저 ‘내외적으로 환자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는 본원의 핵심 가치에 특별히 유념해달라는 당부를 했었다. 
  2016년 현재까지 일본에 보고된 사례가 총 다섯 건, 전 세계적으로 삼백 명 미만의 환자에게 발병한 희귀 질환을 앓고 있는 B동 413호의 VIP가 H제강 총수의 둘째 손자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이야깃거리였다. 대기업 오너의 손자도 운이 지지리 없다는 둥 병 앞에는 돈도 나이도 없다는 둥 회의와 약간의 안도가 섞인 푸념이 가십의 종결이었다. 그리고 소문의 근원은 자신을 향한 관심의 기한이 만료되도록 퇴원하지 못했다.   
  대상이 명확한 기행 또한 오랫동안 지속 되어왔다. 멸균의 공간에서 난치의 불온성을 띤 시라부 켄지로에게는 이따금 담당의의 속을 뒤집어놓는 것 이외의 별다른 취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악의 없고 무해하다고는 하나 성가신 일들을 매번 꾸며내는 머리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안하무인이라고 하죠. 등 비빌 곳이 있다는 걸 아는 애들 말입니다. 그걸 활용할 줄 아는 애들은 악하다고 봐도 좋을 거고요. 어리다고 일일이 봐주면 안 돼요. 따끔하게 꾸짖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니까요.” 
  그렇게 참견하던 동료 의사는 나름의 노하우로 시라부를 어르고 달래볼 요량인 것 같았다. 그러나 시라부는 그의 성의에 보답하지 않았다. “애다운 구석이 없어요. 어른이라고 일일이 참견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라고 쏘더군요. 죽게 놔두라는 식의 말투도 기분 나쁘고요. 좋게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원.” 하고 전하며, 동료는 혀를 내둘렀다. 자세한 정황을 묻지 않았으나 그런 일이 있었다.  
  자신이 입원한 병원의 의사에게 눈총을 살 만한 일에도 거리낌이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만으로 시라부 켄지로에게 생의 의지가 없다고 봐도 좋은가.
  우시지마가 차트를 뒤적였다. 날짜와 환자별로 기록된 진료 기록물이다. 
  “내일은 아침 일찍 항체 검사를 하기로 되어있지.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자는 게 좋겠다.” 
  “라이터는 언제 돌려주실 겁니까.” 
  “네 병이 다 나으면.”
  “장난해요? 낫지 않는 병이잖아요.” 미간에 주름을 잡고 노려본다. 
  “그럼 받을 수 없겠군.”
  시라부는 신경질적으로 슬리퍼를 비벼 벗었다. 구겨진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덮었다. 모서리 바깥으로 깡마른 발목과 맨발이 튀어나온 채로 침대 위에 덩그러니 누워있다.  
  “거짓말쟁이.”
  그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오늘 그가 당직이 아니었더라면 시라부는 얌전히 잠들었을까. ‘나는 선생님을 보고 싶었던 것뿐이라고요’ 따위의 어리광은 듣지 않아도 좋다. 우시지마는 손바닥 중앙에 놓인 담배를 본다. 완전 소각이나 별도의 화학약품을 통한 살균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버릴 수조차 없는 치명적인 보균체.
  봉분처럼 웅크린 시라부가 몸을 뒤척였다. 우시지마는 두껍게 뭉쳐 꽁꽁 싸인 이불을 끌어내린다. 모서리가 목부터 발끝까지 덮게 하고 흘러내리지 않도록 끝단을 정돈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손등을 스쳤을 뿐인데 손가락이 아팠다.
  “내일 보자.”
  나가는 동안에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멎지 않았다. 

 

 

 

 


  시라부 켄지로를 처음 만난 곳은 S대학병원 본관의 옥상이다. 당시 우시지마는 4년 차 레지던트였다.

 

  
  오전 회진을 마치고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한 뒤 옥상으로 올라갔다. 구획을 나누어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서너 개의 화단에 보리수와 자작나무가 무리를 이루었고 길옆으로 낮게 깔린 회양목 아래에 수선화와 천일홍, 꽃잔디가 멍울처럼 피어있다. 자그마한 정자와 화단을 제외한 바닥재가 돌투성이라 인공적인 느낌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업무 중에 잠깐 숨통을 트기에는 충분한 정원이었다. 
  주어진 식사 시간이 삼십 분도 되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단골 가게에서 산 도시락을 서둘러 먹었다. 남은 십 분여간 담배라도 피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필터를 입에 물고 나서야 라이터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 필요하시죠.”
  그렇게 말한 것은 교복 차림의 소년이었다. 
  지포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청량하다. 우시지마는 고개를 조금 숙여야 했다. 숨을 들이마시자 왼손으로 바람을 막은 채 소년이 담배 끝에 불을 붙인다. 한 모금 빨아들였던 연기를 곧바로 허공에 뱉어내며 우시지마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소년이 자신을 시라부 켄지로라고 소개한다. 말끔한 얼굴에 셔츠와 바지에 구김이 없었고 타이도 제대로 매고 있었다. 단정한 용모와 차림새에 딴지를 걸 만한 건 미성년자가 라이터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파란 하늘에 솜털을 찢어낸 듯 구름이 흩어져있다. 문득 담배 연기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우시지마가 자리를 옮기려는데 옷자락이 잡힌다. 
  “여기서 피우셔도 돼요.” 
  “고맙다.”
  말없이 뻐끔거리기를 일이 분. 우시지마는 플라스틱 재질의 도시락 용기에 담뱃재를 털었다. 불똥이 점차 사그라들며 새까만 재의 뭉치만이 남는다. 
  “의사면 사람이 죽는 것도 많이 보셨겠네요.” 그가 목에 건 출입증을 보고 덧붙인다. “우시지마 선생님.”
  “맞아.” 
  시라부는 난간에 몸을 바짝 기대고 있다. 단이 높아지는 곳에 발을 올리고 양팔을 겹쳐 상체를 받치고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불어오는 연기를 그대로 들이마시면서도 떠날 생각은 없는 성싶었다. 다듬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반쯤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왠지 멋있는 것 같아요.”
  “뭐가 말이지?”
  대답은 없었다. 실없는 말을 해도 웃음이 많은 부류는 아닌 듯했다. 
  필터부가 누렇게 변색되고 구겨진 꽁초가 어느새 도시락 재떨이에 처박혀 있었다. 그제야 우시지마는 해야 할 말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어른의 자격 미달이다.
  “담배 피우나?”
  “가끔요.” 
  “시라부라고 했던가.”
  “네.”
  “라이터 다시 줄 수 있겠나.”
  “하나 더 피우시게요?” 
  시라부는 우시지마의 손바닥에 라이터를 내려놓았다. 모서리가 둥글게 마감된 검은색 지포였다. 우시지마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가운의 윗주머니에 라이터를 넣었다.
  “뭐야…….”
  “성인이 되면 돌려주지.”
  “씨발 당신 뭐냐고!”
  길길이 날뛰는 시라부를 남겨두고 업무에 복귀했다. S병설 희귀병센터의 진료실에서의 재회는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이루어졌다. 원래 그날은 시라부의 졸업식이었다고 했다. 우시지마는 어째서 학교에 가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느냐고 물었고 시라부는 “죽을병에 걸린 마당에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라이터 비싼 거니까 내놔요.”라고 답했었다. 
  발견자의 이름에 따라 정식 명칭은 베로다 증후군. 1980년대 말 동유럽에서 최초 발생한 만성 감염증. 학명은 atrocordis. 기침, 객담, 호흡곤란, 구토, 발열, 발한, 발진, 소화불량, 체중감소, 두통, 흉통, 근육통, 관절통, 쇠약감, 신경과민, 무력감 등의 전조증상을 필두로 환자의 면역체계가 지속적으로 상실되며 이는 기타 염증성 질환이나 포진 바이러스의 기회감염을 유발. 단순 접촉으로는 전염되지 않으며 바이러스의 주된 경로는 비말(飛沫)이나 점액. 인자의 유입과 변형과정, 무증상기의 기간, 보균자에서 발병자로의 전환 요건은 불분명. 
  생물학적 조건과 의학적 가능성을 생략하여 최소한의 인과만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환자는 수년 이내에 몸이 말라 죽는다. 본격적으로 증상이 나타난 후로 5년을 넘긴 경우가 극히 드물다. 최근 백신을 개발 중인 매니토바의 연구소에서 소수의 긍정적인 사례가 발생하고 있으나 유일한 완치 환자는 재검진을 받기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으므로 치료의 경과를 확인하지 못했다.
  병원균에 노출된다고 하여 모두가 감염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감염자에게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확률만 놓고 보았을 때 전염성이 높은 질병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 활성화에 따른 급성 발작과 통증을 완화하거나 경감하기 위하여 특수한 약물들을 단일 또는 혼합적으로 처방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게 시라부 켄지로가 413호에 갇히게 된 이유였다.
  해가 바뀌어 우시지마는 전공의 시험에 합격해 펠로우가 되었다. 그리고 시라부가 입원한 지는 올해로 2년이 된다. 그동안 잔병치레가 잦아졌고 몸무게가 줄었다. 병의 진행이 이론과 같다면 남은 기간은 길어야 3년 남짓이다. 
  오늘 우시지마의 진료실에 방문한 사가에 다이스케는 H제강의 사업총괄본부장이자 사장인 시라부 히데키의 비서였다. 그는 입원비용과 기타 생활비를 대는 것 이외에는 혼외자에게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나 가끔 병문안이나 상담을 이유로 대변인을 보내고는 했다. 
  “우시지마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사가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오른손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우시지마가 맞잡았다가 놓는다. 
  “본부장님께서는 아드님이 혹여 폐를 끼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많으십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다행이군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사가에가 소파에 앉는다. 이마가 반듯하고 뼈대에 굽은 곳이 없다. 사무적인 예의를 갖추면서도 무겁지 않은 태도였다. 
  “오늘 방문한 건 다름이 아니라.” 그가 머리를 쓸어넘긴다. “켄지로 군을 캐나다로 보내는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인데요.”
  그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의논해왔다. 
  미완성에 불과하대도 아직까지 베로다 증후군에 관하여 가장 성공적인 실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캐나다 매니토바의 N센터였다. 의대 시절 은사였던 와시조 탄지 교수가 부원장으로 부임한 곳으로 손에 꼽힐 만큼 우수한 의료진과 선진적인 시스템을 갖춘 시설이다. 개발 중인 신약과 새로운 치료법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은 시라부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될 터였다.
  시라부 히데키 정도의 대기업인이라면 N센터에서 소요될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시라부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가부를 결정할 마지막 조건은 당사자의 동의였으나 시라부 켄지로는 번번이 제안을 뿌리쳤다. 
  “실은 방금까지 켄지로 군의 병실에 들렀다 오는 길입니다. 아직도 잔기침을 하더군요. 지금 날씨를 감안하면 정상이 아니죠.”
  “지난주에 걸린 독감이 아직도 낫지 않았습니다.”
  환절기를 지나 날씨가 온화했음에도 시라부는 감기든 독감이든 놓치는 법이 없다. 
  낮에 담배를 사러 들렀던 편의점에서 카운터 근처에 놓인 초콜릿을 들었다가 놓길 서너 번. 우시지마는 밀크니 청크니 녹차 맛이니 딸기 맛이니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적힌 글자들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은 기본적인 것을 골라 계산했다. 
  “단 건 안 좋아한다니까요.”라던 시라부가 앉은자리에서 반절을 먹어치웠다. 카카오에 함유된 테오브로민은 감기 치료제와 유사한 작용을 하는 데다가 초콜릿의 당분으로 열량 소비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서 입가를 닦아주었다. “이제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던 시라부를 귀여워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우시지마가 눈을 들어 벽시계를 본다. 시곗바늘이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시라부에게 RICB 억제제를 투약할 시간이었다. 환자복 소매를 걷으면 드러나는 팔뚝과 푸르스름한 주사 자국, 약간은 처연한 눈빛이 떠오른다. 
  “병세가 악화될 뿐이라면 입원 치료니 약물 요법이니 하는 것들이 죄다 무슨 소용입니까?” 사가에가 따지듯 물었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에서는 진행을 늦추는 것 이상의 조치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듯 혀가 무겁다. 사가에의 말은 우시지마가 스스로 몇 번이나 되물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일본 내에서 베로다 증후군 환자에게 근본적인 치료를 제공할 여력이 있는 시설은 없으며 이곳 S병원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현상 유지가 전부로, 갑작스러운 발작과 기타 긴급상황에 대비하고 면역력 저하에 따른 합병증의 발병을 막는 것이 지금으로써는 최선이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시간 낭비가 될 테죠. 제가 봐온 선생님께서는 입이 가벼우신 분 같지 않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듣고 잊어주십시오.” 비서가 앉은 채로 상체를 약간 숙였다. “실은 켄지로 군을 계속 일본에 둘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시다시피 재벌이니 사생아니 희귀병이니 하는 것들은 일반인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기 좋은 소재 아닙니까?”
  대개 대기업 임원의 공식 회견이라면 사측과 언론측 쌍방이 사전에 의논하여 대략적인 질답 목록이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나, 어디에나 제도를 벗어난 돌연변이 프레스가 등장할 틈은 있는 법이어서, 재무제표나 거시적 의사결정이나 기업 내부 상황에 국한되지 않는, 이를테면 개인의 윤리관이나 사생활에 관련된 주제가 언급될 가능성도 적지 않은 것이다. 
  하반기 인사개편을 앞둔 현 상황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생아’를 시사하는 기사라도 등장한다면 시라부 히데키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 분명했다. 모든 책임은 결국 시라부 켄지로의 출신에 전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사가에의 주장이었다. 그에 따르면 시라부 켄지로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흠이다. 
  담당 환자의 증상에 대한 문답이 이루어져야 할 자리였다. H제강의 인사개편 따위가 시라부 켄지로의 병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곱씹을수록 불쾌해진다.
  “N센터의 치료 성공률은 이십 퍼센트 미만입니다. 결코 높은 편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드렸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가능성을 확인해주신 것 역시 선생님이셨죠.” 노려보는 눈길을 시가에는 교묘하게 빗겨낸다. “이제 와서 본부장님의 부성애나 자식을 위한 근심 같은 걸 설파해봤자 소용없으리란 생각이 드네요. 켄지로 군을 일본에 두거나 캐나다에 보내는 건 가치판단의 문제입니다. 그분은 사업가시니까 절대적인 기준은 효용이 되겠죠. 저희가 그쪽의 확률까지 통제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고요.” 
  한마디로 욕을 먹기 싫으니 죽든 살든 해외로 보내버리겠다는 말이 될 테다. 비서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윗분들의 사정이니 이해해달라’ 정도의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면 우시지마 선생님께서는.”
  사가에의 결론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쪽 세계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다만 판단의 근거를 납득하지 못했을 뿐이다. 
  기회가 있으면 잡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이쪽이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시라부 히데키도 사가에 다이스케도 우시지마 와카토시도 아니다. 
  “나도 켄지로를 캐나다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좋습니다. 이로써 재계와 의학계의 결론이 일치했다고 봐도 좋겠군요.”
  남자의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상대는 비서가 아니라 그의 상사가 되어도 좋다. 사가에가 후련한 얼굴로 웃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를 조금 지운다. 
  “그건 켄지로가 결정할 일입니다. 실제로 병을 이겨내는 데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본인의 의지이기도 하고요.”
  “켄지로 군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어려서부터 말썽이 많았어요. 졸업도 못한 건 알고 계시죠? 아마 엉망인 가정사의 영향이 크겠죠. 가엾긴 해도 그뿐입니다.”
  우시지마는 ‘쓸데없는 고집’이라는 표현의 부적절함을 부연하지 않는다. 해외 치료를 거부하는 근본적 원인을 부모에 대한 반항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시라부가 증오에 얽매여 자신의 삶을 내던질 정도로 무분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끔 놀랍도록 냉정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내리는 청년을 생각한다. 그는 정해진 시각에 처방된 약을 먹고 바늘이 두꺼운 주사와 링거를 맞고 운동을 하고 날마다 손가락으로 팔뚝의 둘레를 측정한다. 감금이나 다름없었던 2년여의 병원생활을 철저히 준수하며 모든 지침에 한 점의 토를 달지 않았다. 
  “켄지로 군은 선생님을 잘 따르는 것 같더군요. 선생님은 강단이 있어 보이시니까 겁 없는 청년도 무서움을 느끼는 건지,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어쩌면 선생님께 제가 모르는 상냥함이 있을지도…… 역시 저보다는 선생님이 설득해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등받이에 기댄다. 비서가 돌아가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책장에 놓아둔 지포를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시라부가 성년을 맞은 뒤에도 돌려주지 않은 물건이다. 
  사가에는 결국 가치판단의 문제라고 했었다. 시라부 히데키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우시지마는 의학적인 관점에서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시라부 켄지로는…….
  5월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우시지마는 시라부에게 생일 선물로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제가 몇 살인지도 몰랐으면서 생일은 아세요?”
  “그래.”
  어찌 되었건 싱글거리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S대학병원의 안뜰은 무성한 녹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멈춘 듯 보였다. 얼기설기 겹쳐진 연녹색 이파리 아래로 햇빛이 드리우는데 풍광은 선명하기보다는 다소 옅고 고운 인상이다. 조각조각 부서진 오후의 햇살이 부드럽고 따스하게 흩어져 꽃이며 나무며 어린아이의 머리카락이며 할 것 없이 시야를 희고도 노르스름하게 물들인다.  
  양버즘나무 산책로에 희고 둥근 꽃잎을 매단 산딸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다. 걸음을 옮기는 대로 시라부의 마스크에 희미한 그림자가 졌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5월 4일을 앞둔 어느 평일의 오후였다. 시라부의 생일 당일에 우시지마의 일이 밀릴 것을 대비하여 며칠 일찍 약속을 잡았다. 
  “정말 이걸로 되겠나.”
  “어쩔 수 없잖아요.” 
  시라부가 손으로 차양막을 만들었으나 엉성하게나마 볕이 든다. “그늘로 갈까.” 하고 시라부를 길가의 벤치로 이끌었다. 
  “밖에 나갈 수 없으니까 가끔은 일상이 그리워져요. 사람이 많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거나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는다던가 하는 사소한 것들이요. 그래도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따로 있는데…….”
  “그게 어디지?”
  새하얀 옷감에 푸른색으로 새겨진 병원의 마크가 눈에 따갑다. 감기는 나았지만 몸이 으슬으슬하다기에 가디건을 걸치게 하고 나왔더니 목덜미에는 투명한 땀방울이 돋아있다. 
  “이런 말 하면 비웃으실지도 모르겠지만요.”
  시라부의 단어 선택은 대개 이런 식이다. 웃으면 웃는 거지 비웃을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러나 나름의 귀염성이 있으므로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 
  “안 웃을 테니까 말해 봐.” 
  “저 놀이공원에 한 번도 못 가봤거든요.”
  유수 대기업 후계자가 외도로 낳은 사생아가 불의의 사고로 모친을 잃은 뒤에야 시라부 가문의 호적이 수정되었다. 당시 시라부 켄지로는 열 살도 되지 않은 초등학생이었다. 
  이미 본처에게서 아들을 하나 둔 시라부 히데키가 한 일이라고는 불의의 씨앗을 거둔 것이 전부다. 시라부 켄지로는 본처와 장자 곁에서 겉돌며 자라다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난치성 희귀질환에 걸리게 된다. 삼류 드라마의 소재로도 쓰이지 않을 기구한 팔자였다.  
  “모처럼 신경 써주셨는데 저도 현실성을 고려하는 게 맞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숙한 눈빛이다. 그러니까 시라부에게 고집쟁이라든가 이성을 잃어 판단 능력을 상실했다든가 하는 표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우시지마가 시라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들었다가 끄트머리에 물기가 어린 채로 빠져나간다. 촘촘히 짜인 가디건 아래로 돌출된 등뼈가 팔꿈치에 닿았다. 
  “뭐예요, 갑자기.”
  짜증을 내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이 기울어진다.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우시지마의 어깨를 타고 주륵 미끄러지던 머리가 무릎 위에 드러누웠다.
  “오늘 선생님은 내 생일 선물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죠.” 
  “호출이 떨어지면 돌아가야겠지만 일단은 그래.”
  “한 시간 동안 제 베개가 되어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고개가 뻣뻣하게 굳어있다. 시라부는 다리도 굽히지 않고 어정쩡한 자세였다.  
  “기왕 누워있을 거면 편하게 있어.”
  몸을 추켜올려준다. 가운 위로 연갈색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허벅지에 닿은 귀와 옆얼굴이 조금은 뜨겁다.
  “선생님은 쉬운 남자네요.”
  “쉬운 남자라는 게 무슨 뜻이지?”
  “그것도 몰라요?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사람 말이에요.”
  “너는 아무나가 아니니까.”
  밑에서 숨을 삼키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을 동그랗게 벌리기라도 한 걸까.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 나한테만이에요?”
  “아마도.”
  “왜요?”
  꼬치꼬치 캐물으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내려다보니 눈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가로수의 잎사귀가 아직은 성겨 완전한 그늘을 드리우지 못한다. 
  스스로 의사라는 직무에 충실하다고 자부하고 있다. 의료인에게 일 순위는 환자일 테지만 아무 의사가 아무 환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휴가를 반납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시지마가 손을 들어 시라부의 얼굴을 가렸다. 눈가에 짙게 그림자가 졌다. 
  “켄지로, 캐나다로 가라.”
  “그건 예전에 끝낸 얘기잖아요.” 
  애초에 시라부에게 N센터 신약의 순작용과 부작용을 설명했던 사람은 우시지마였다. 환자 본인에게 일방의 효과만을 소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이러스 제거에 따르는 약물의 부수적인 유해 반응은 조혈모세포의 증식 장애를 유발하며 이는 과립구의 감소에 따른 재생불량빈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미 면역력의 일부를 상실한 베로다 증후군 환자에게는 출혈과 외부 감염 증가는 치명적인 위험이다. 
  시라부 켄지로에게 발생할 수 있는 의학적 경우의 수가 두 가지뿐인 것은 아니다. 약물과 병행되는 고강도 치료는 상상 이상의 고통이 될 것이며 쇠약해진 신체가 신약의 부정적인 효과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수명이 심각하게 단축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정확하게는 실패율이 성공률 이상이다. 
  “그 사람이 날 얼른 치우고 싶어하는 건 알고 있었어요. 선생님까지 매수할 줄은 몰랐지만요.”
  “돈을 받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세요. 베개 주제에.”
  “네가 더 좋은 치료를 받았으면 해서다. 나는 네 의사니까.”
  “선물로 꼬시면 넘어갈 줄 알았어요? 제가 그렇게 단순해 보이냐고요.”
  시라부가 팔을 들어 올렸다. 허여멀건한 손가락이 우시지마의 미간을 문지른다. 그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강제로 보낼 수도 있어. 내가 긴급 이송을 허가하고 수면제를 처방해두면 넌 캐나다로 날아간 뒤에야 깨어나게 되겠지.”
  “선생님은 그러지 않으실 거잖아요.”
  시라부가 단정했다. 담담한 시선에 손톱 밑이 찔린 듯 아프다. 닿은 손끝이 차가운 건지 머리에 열이 오른 건지 알 수 없어졌다.
  “여기서 3년간 사는 것과 캐나다에서 완전히 낫거나 더 빨리 죽는 것…… 씨발 둘 다 좆같은데 뭘 고르란 말이야.” 시라부가 중얼거렸다. “내가 캐나다에서 죽기라도 하면 나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릴 거예요. 선생님은 바보니까.”
  어느새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손이 셔츠의 칼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목의 둘레를 덧그리다가 턱을 쓸어내리며 장난을 친다. 잡아 끌어내리거나 타박하지 않고서 우시지마는 다정한 손길을 받고만 있다. 
  “헛된 희망을 심어주려는 게 아니야. 나도 몇 달 동안 생각하고 고민했어. 네 나이와 체력과 병의 진행상태를 하나하나 따져봤다. N센터에서 보내온 예측치도 나쁘지 않았어. 내 말 들어라, 켄지로. 지금이 아니면 늦어. 진심이다.” 
  “화를 내고 계세요. 어째서죠?”
  “아마 네가 버릇없는 말을 해서겠지.”
  마스크 너머로 씁쓸한 웃음이 들렸다.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왔다. 우시지마는 병실에 들어가기 직전 마스크를 착용한다. 안에서 발작적인 기침 소리가 터져나온다. 
  시라부가 이불을 모두 걷어찬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다. 이따금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몸부림쳤다. 깡마른 허리가 굽어졌다가 늘어지기를 반복하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환자복 상의가 축축하게 젖었다.
  진정제를 놓았지만 소용이 없다. 더욱 강력한 것이 필요했다. 
  팔뚝이 이리저리 꺾이고 비틀린다. 주먹을 쥐듯 손을 구부렸다가 자신의 몸을 할퀴고 허공을 향해 내뻗기도 한다. 얼굴은 시신처럼 창백했다.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질러대는 시라부의 팔과 다리에 사람이 둘이나 달라붙는다. 강하게 휘둘린 팔을 놓치며 누군가 넘어졌다. 철제 트레이가 함께 쓰러지며 와장창하는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수련의가 다시 일어나 시라부를 잡는다.  
  신경계를 안정화하는 약물을 정맥에 주사하고 나서야 바이탈이 안정된다. 
  신참 간호사가 침대의 시트를 새것으로 갈았다. 구겨진 이불에도 피가 조금 묻어있다. 가느다란 실타래가 엉켜있는 듯 경계가 불규칙하며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새빨간 자국 서너 개는 시라부가 토해낸 것들이었다.
  우시지마는 간호사와 수련의를 보내고도 침대 옆에 앉아 시라부를 지켜보았다. 일 분을 넘기지 않고 진료실로 돌아가 다른 환자를 돌봤다. 시라부가 피를 토했다고 한들 부주의나 태만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긴장감을 덜어내기 위하여 평소보다 조금 더 집중해야 했을 뿐이었다. 
  창밖에 자홍색 꽃 뭉치가 어른거린다. 가지마다 솔잎 같은 꽃잎을 틔운 꽃개회나무였다. 배롱나무에도 자그마한 흰 꽃들이 자글자글 매달려 있다. 
  때는 어느덧 한여름으로 바깥 날씨가 지글지글 끓는 듯하지만 병실 온도는 22도를 넘지 않는다. 환자에게는 얇은 이불을 덮어도 좋을 만큼 서늘한 공기 속에서 시라부는 여전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기절했던 이틀간은 수액을 통해 영양소를 공급했다. 이번이 발작 이후로는 첫 식사였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이제 한두 번 있을 일도 아닐 텐데.” 시라부가 뚱한 표정으로 손을 내민다. “물이나 주세요.”
  깨어나서 다행이라는 말도 몸은 괜찮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의식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고도 우시지마는 하던 일을 계속했고 일과를 마친 뒤에야 병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바위처럼 앉아 시라부 켄지로가 밥을 욱여넣는 꼴이나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천천히 먹어. 체한다.”
  “안 그래도 체할 것 같거든요. 누구 때문에.”
  시라부는 건넨 물병을 낚아채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머지 음식을 모두 먹고는 병실에 딸린 화장실에서 양치까지 하고 나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시지마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선생님은 의사면서 그렇게 한가해요?”
  침대 위로 올라온 시라부가 이불을 뒤적인다. 리모컨을 꺼내어 TV를 틀었다. 이쪽을 흘끗 보더니 애꿎은 채널만 돌리기 시작한다. 
  “얼굴만 보고 퇴근하려고 했어.”
  “봤으니까 집에 가시면 되겠네요.”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우시지마는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심했던 건 처음이다.”
  “또 잔소리…….”
  “켄지로.”
  낮게 부르자 시라부가 입을 다물었다.  
  “무서워.”
  “뭐가.”
  “전부 다요.”
  차가운 얼굴이 뱉는 숨결은 점차 더워진다. 졸음기에 잠겨있던 눈이 무섭도록 일렁이는 듯하다.
  “나라고 여기에 갇혀 죽는 게 좋은 줄 알아요?” 시라부는 화를 내는 것도 같았고 슬퍼 보이기도 했으나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아픈 건 싫어요. 죽는 건 무섭고요. 이 년이든 삼 년이든 좋아요. 더 짧아도 괜찮아요. 얼마가 되든 존나 상관없다고요. 그보다 난 살아있는 날들을 선생님 곁에서 보내고 싶단 말이에요.” 계속해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지껄이고 있다. 잇새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가시와도 같다. “나는 내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아요.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선생님이 없는 곳에서 죽는 건 싫다고요. 죽는 것보다 더 싫다고요. 무서워서 나 혼자 버틸 수 없다고.”  
  온몸으로 부딪쳐오는 감정이었다.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다. 돌이켜보면 시라부는 항상 그랬다. 모든 모서리를 사포로 갈아내는 듯 쓰라리고 괴롭다. 
  “왜 몰라요! 왜 선생님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다가 멈춘다. 입매가 일그러지며 시라부가 등을 침대의 헤드에 기댔다.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이마를 닦아낸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시라부 켄지로도 죽는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우시지마는 지금까지 수많은 환자의 죽음을 보아왔으며 어떤 것에는 침착했고 다른 어떤 것에는 슬퍼했고 더러는 분노하기도 했었다. 당연한 죽음은 없었고 아무렇지 않은 죽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시라부가 피를 토해냈을 때보다 절망했던 적은 없다. 입에서부터 울컥 튀어나온 핏덩어리가 차라리 자신의 것이길 바랐던 적도 처음이다.
  이곳에서의 3년도 조건부 수치일 뿐이었다. 적어도 병원에서는 예상이 틀렸을 확률이 예상치 자체보다도 높다. 또한 시라부가 매니토바로 떠난다 한들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갈 운명이 예정되어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네가 아니라 나였다면’이라는 불가능한 가정에 녹아있는 절실함을 이제야 안다. 만약 그가 무너진다면 원인은 시라부 켄지로 하나일 테다. 그건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와 같은 단순하고 추상적인 바람에서 와시조 탄지 교수의 저서와 논문들, 베로다 증후군에 대한 의학계 최신 동향, 매니토바 N센터에서 머물렀던 모든 환자들의 데이터 따위의 다소 현실적인 근거들에서 머물렀다가, ‘죽게 놔두지 않겠다’는, 동정과 연민과 안타까움과 사랑과 쓸쓸함이 섞인 결심 혹은 욕심으로 옮겨간다. 
  담담하게 인정한들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으나 시야가 선명해지는 것 같다. 그를 사랑하고 있다. 애당초 견딜 수 없는 것은 이쪽이었다. 이기적인 결정이라도 어쩔 수 없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시라부 켄지로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니까 죽을 만큼 아프고 무서워도 나를 위해 견뎌줘. 
  시라부는 시트를 거칠게 움켜쥐고 있었다. 희게 질린 피부 아래로 혈관이 비치고 뼈가 불거진 손등이 조금은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우시지마가 시라부의 손을 감싼다. 손가락들과 손바닥 사이에 끼워진 천 자락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캐나다로 가라.”
  그리고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시라부의 손을 끄집어올린다. 악력을 잃고 느슨해진 손바닥이 우시지마의 얼굴을 향했다. 고개를 숙여 수많은 주름과 빗금으로 형성된 미로에 입을 맞춘다. 코끝이 엄지의 마디에 닿았다가 떨어지고 검지와 중지가 갈라지는 부분에 부드럽게 파묻힌다. 면 마스크 너머로 입술을 천천히 문질렀다. 
  짓눌러지다시피 넘치는 애정이다. 시라부가 으스러지도록 품에 껴안고서 눈코입과 이마와 귀와 뺨과 턱, 얼굴 곳곳에 키스를 퍼붓고 싶었으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손바닥에 입술을 대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나를 위해 살아줘.”  

 

 

  

 


  시라부가 떠난 지 반년이 지났다.  
  B동 413호는 새로운 환자로 채워졌다. 활달한 인상의 40대 남성은 희귀성 당뇨를 앓고 있었다. 일반 병원에서 취급되지 않는 약물을 투여해야 할 뿐 증세 자체가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 그는 창가에 크고 작은 액자들을 늘어놓고 장식장에는 모자이크 구피 대여섯 마리가 담긴 어항까지 가져다 놓으며 병실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6개월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으나 우시지마는 시라부가 없는 시간이 다소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시라부는 죽지 않았다. ‘아직’ 죽지 않은 것이 아니고 ‘간신히’ 죽지 않은 것도 아니다. 더 이상의 신파는 사양이다.
  지난주에는 정기 검진 결과를 받았다. 5차례에 걸친 치료는 시라부의 몸과 바이러스를 동시에 태우고 있다. 말하자면 혈액 내 항원과 항체의 장기적 힘겨루기인 셈이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우시지마는 시시때때로 시라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밥은 먹었냐 잠은 잘 오느냐 따위의 시시콜콜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으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충만해진다. 국제전화로 인한 통화료 폭탄 따위는 망설임의 사유가 되지 못했다.
  편지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마땅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어쩌면 고뇌하기 전에 전화부터 걸게 되기 때문일지도. 편지지 상단에 ‘시라부에게’라는 글자만 적어놓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시라부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고 쓰는 게 좋을지 물어봤다가 한소리 들었던 적도 있다.  
  그런 시점에 캐나다를 방문할 기회를 얻은 것은 행운이었다. 와시조 부원장의 비공식적 초청으로 N센터에 머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리타에서 벤쿠버까지 열 시간, 벤쿠버에서 위니펙 공항까지의 비행이 다시 세 시간이었다. 인고의 6개월에 비하면 열세 시간 정도야 눈 깜빡할 사이일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운이 나빴던지 나리타 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에는 일본을 경유한 타국의 단체 여행객만 수십 명이었다. 기내는 비행 내내 부산스럽고 소란스러웠다. 승무원이 주의를 주기도 여러 번이었다. 우시지마는 벤쿠버에 도착하여 캐나다 국내선으로 환승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쪽잠을 청할 수 있었다. 
  늘 비쩍 마른 몸에 환자복 차림이었던 시라부가 무슨 옷을 입고 있을지 머리를 잘랐을지 체중은 조금 불었을지 가끔은 웃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할지, 전화상으로 괜찮다고 말했었고 진단 결과도 희망적이었지만 실물은 파리한 낯빛에 보랏빛 입술 따위를 지닌 것은 아닐지, 아픔과 외로움과 괴로움에 많이 상해있을지 따위를 떠올리며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가 안내방송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위니펙 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니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달라는 내용이었다. 
  누군가 숨통을 조르는 듯, 우시지마는 답지 않게 긴장감에 젖어든다.
  수화물을 찾은 후 게이트를 지난다. 작은 도시의 국내공항인데도 내부가 제법 번잡했다. 별안간 우시지마의 품으로 어린아이가 뛰어들기도 하고 몇몇 여행자들과 몸이 부딪히기도 했다. 때로는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으면서 표지를 따라 걷는다. 우시지마는 안내데스크에서 다운타운으로 가는 차편을 물었다. 
  12월 중순의 캐나다. 홀 중앙에 중형 트리가 서 있고 통로의 벽면마다 붉은 리본이 붙은 크리스마스 리스, 산타나 루돌프 따위가 그려진 그림 액자들로 장식되어있다. 코끝이 빨갛게 물든 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바깥에는 눈이나 비가 내리는 모양이었다. 
  코트의 단추를 채우고 머플러를 둘렀다. 캐리어 바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시차 때문인지 잠을 설친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뒤에서 누군가 팔을 툭툭 쳤다.
  겨울이라고는 해도 평균 최저기온이 영하 1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일본과 비교하면 초겨울과 유사한 날씨였으나 남자는 두꺼운 패딩을 껴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볼캡을 썼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색소가 옅은 눈동자로만 동동 떠다니는 것 같다.
  “켄지로?”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앞에 보세요. 선생님이 넘어지면 저 못 받아요.”
  시라부는 우시지마의 고개를 똑바로 돌려놓고 귓가에 속삭였다. 몸은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어딘가에 심장을 두고온 것처럼 속이 덜컹덜컹 흔들린다. 아무것도 잡지 않았는데 손바닥이 간지러워지는 것만 같았다.
  1층에 내려서자마자 시라부를 보고 섰다. 한동안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는다. 
  얼굴을 마주한 시라부는 어느 때보다도 혈색이 좋아 보인다. 참지 못하고 와락 끌어안았다. 모자 속에 가려진 뒤통수가 한 손에 들어오는 듯하다. 
  “건강하게 있어줘서 고맙다.”
  “낯간지러운 말은 됐어요. 전화로도 많이 말씀하셨잖아요.”
  “나와있을 줄 몰랐어.”
  “못 알아보실 줄도 몰랐네요. 겨우 몇 달 못 봤다고.”
  시라부가 볼멘소리를 뱉으며 감색 코트의 윗주머니에 턱을 비볐다. 발끝을 세우고 있었다. 가슴이 빠듯하게 차오르며 두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젯밤을 꼬박 새웠다는 말을 하면서도 컨디션은 기대 이상으로 좋아 보였다. 전반적으로 상태가 호전되었고 전염 위험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되어 외출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여전히 구강 접촉은 금지였고 상비약과 마스크가 필수품이 되었지만 병원 외부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다.
  “여기서 사흘간 머무른다고 하셨죠.”
  “그래.”
  “선생님이랑 하고 싶었던 걸 정리해서 리스트로 만들어봤는데요.”
  “리스트?”
  어이가 없어 잠깐 웃었다. 조금 뻔뻔해졌다고 해야 할까. 6개월 동안 낯짝도 두꺼워진 것이 틀림없다. 물론 변함없이 사랑스럽다. 
  “왜 놀라고 그러세요. 선생님은 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기 위해서 오신 거잖아요.”
  “맞아.”
  그러니까 함께 영화를 보고 놀이동산에 가고 커피를 마시고 쇼핑도 하고……. 조잘조잘 떠드는 시라부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걸었다. 어느새 이야기는 확장되어 일본으로 돌아간다면 검정고시를 준비할 예정이며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진학하겠다는 다짐이 결의된다.
  “그래도 밥부터 먹어야 할 것 같다. 여기까지 날아왔더니 배가 고파.”
  “제가 식당을 하나 알아놨어요.”
  나란히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자동문을 통과하니 겨울 바람이 쌀쌀했다. 
  “참, 그건 가져오셨어요?”
  “완치되면 준다고 했잖아.”
  “진짜 똥고집하고는…….”
  완만한 각도로 굽어진 나뭇가지에 눈송이가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우시지마가 시라부의 오른손을 잡고 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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