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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 뛰던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짚고 선 우시와카의 입에서 더운 숨이 거칠게 흩어져 나왔다. 이윽고 몸을 바로 세운 그의 입에선 거친 욕지거리가, 그리하여 짜증스러운 감정을 모두 털어버리겠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젠장.”


모함과 비슷했다. 아니, 모함이었다. 이 두 글자가 아니고서는 절대 정의되지 않는 이 상황은 정상적인 사고회로를 모두 끊어놓을 만큼이나 부조리해서 도저히 납득이라곤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시와카는 분노로 인해 떨리는 두 주먹을 숨기듯이 주머니에 쑤셔놓고 느릿하지만 큰 보폭으로 다시금 뛰어왔던 길을 걸었다.

상비군이라는 타이틀은 필요 없다. 애당초 그 단어는 저를 위한 단어가 아니었다. 국가대표, 그 네 글자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왔는데, 결과는 어째서 상비군이라는 세 글자가 더해진 한낱 2류 선수가 되어버린 건지. 한 번도 아니고 무려 3번이다. 세 번이라는 기회 동안 저는 늘 상비군에만 머물러야 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절대 자만심에 도취된 것이 아니었다. 저의 무수한 노력을, 모두는 안다. 남들이 목에 수건을 걸고 물을 들이키는 순간에도 전 맑은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훈련을 멈추지 않았고, 온 세상이 새카만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저도 저만큼은 홀로 남아 체육관의 빛을 뿜는 전등이 되었다. 분명 모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제가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눈앞에서 펼쳐지는 경기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자리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칭찬에 인색한 감독마저 침이 마르도록 말문을 트이게 한 사람이 누군데. 널 국가대표로 만들어줄게. 그 한 마디에 저 또한 힘을 싣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왔는데. 이건 정말, 믿을 수 없이 부당하다.

도시가 잠든 새벽, 우시와카는 걷고 또 걸으며 화를 삭이기 위해 노력했다. 한 시간이 두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이 세 시간이 되었을 무렵, 평소 아침산책을 위해 자주 찾았던 공원에서 걸음을 멈춘 우시와카가 빈 벤치에 몸을 묻는다. 스르륵 무너지는 몸을 막지 않았다. 하릴없이 버석한 모래바람 같은 한숨이 터졌다.


“……우시지마 선배?”


우시와카는 문득 귓가로 감기는 제 이름에 몸을 뻣뻣이 세우며 광란을 뿜을 듯한 야생마 같은 눈을 홉뜨고 주위를 살폈다. 지금 이 시각에, 저를 아는 이가 있을 리가 없는데.


“진짜 맞아요? 선배가…, 맞아요?”


새벽바람을 타고 허공에 너울거리는 목소리가 왜인지 낯설지 않았다. 우시와카는 묘한 익숙함에 미간을 씰그러뜨리며, 어디 서 있는지 모를 사람을 향해 중얼거렸다.


“……누구야. 나와서 얘기해.”


서늘한 공기가 어찌할 틈도 없이 뒷목에 닿는다. 우시와카는 휑한 느낌의 뒷목을 손으로 감싸다말고 불현 듯 눈앞으로 튀어나온 검은 인영에 행동을 멈추었다. 부스럭거리며 짓밟히는 낙엽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죠.”


나예요, 시라부. 잔정하게 끝맺음하는 말에 우시와카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한 번 떠보였다가, 이윽고 벌떡 일어나 어둠 속에서도 빙긋이 웃고 있는 시라부를 끌어당겨 제 가슴에 가득 품었다. 시라부, 네가 어떻게……. 우시와카는 시라부가 숨이 막히다며 옆구리를 툭툭 칠 때까지도 그를 놓아주지 못했다.

일종의 비상구였달까. 우시와카에게 시라부란 언제나 휴식처였고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로였던, 그런 애틋한 존재였다. 8년 전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저를 그리움이란 미로 속에 빠뜨렸던 그였는데, 어째서 지금 이 시각에 제 눈앞에 있는지. 환영이 아니길 바랐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대요. 당신의 슬픔, 아니 그 어떠한 감정이라도 좋으니 제게 나눠주세요.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
―당신은 나의 우상이잖아요.


당신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언젠가 나눴던 대화가 뇌리를 스치며 추억이라는 희붐한 안개에 불을 밝힌다.


“선배 그동안 더 열심히 했나 봐요. 몸이 더 단단해졌네.”


대리석 끌어안는 줄 알았어요. 농담 섞인 시라부의 말에 언뜻 희미한 미소가 번져있는 듯했다. 그 웃음은 8년이라는 그들의 긴 공백을 모두 메울 수는 없었지만 피를 차갑게 식히던 우시와카의 분노를 잠재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약이었다. 

우시와카는 목울대까지 치고 올라왔던 억울함과 분통이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은 것을 느끼며 시라부의 가는 손목을 쥐고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시라부는 자연스러운 손길로 우시와카의 어깨를 툭툭 털어내는 시늉을 하며 그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여기 있는 무거운 짐, 제가 잠깐 털어내도 되는 거죠? 

그 목소리에 우시와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만큼이나 냉기를 품은 시라부의 손을 잡아 쥐었다. 힘겹게 몰아치는 그리움이 손에 닿는 체온으로 하여금 하나도 남김없이 전도될 것 같았지만 차라리 그리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라부, 난 네가 이만큼이나 필요했으니까.


“……잘 지낸 거냐.”


그러나 말이라는 건 생각만큼이나 대단치 못해서, 온몸을 휘감는 감정들을 표현하기엔 더없이 어려웠다. 우시와카는 한 마디로 함축시켜버린 제 감정들을 고이 눌러내며 짐짓 초연한 표정을 했다. 망설이는 듯한 그의 어투에 시라부는 새벽달만큼이나 밝은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요. 운동하느라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저 책도 냈어요.”


해어화(解語花). 당신이 지어준 별명으로, 당신과 함께한 추억을 담아낸 책이요. 시라부는 혀끝까지 대롱거리는 말들을 목뒤로 넘겨 삼킨 후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제 자신이 우스워져 보였다. 학창시절의 전부를 배구라는 운동에 모두 쏟아 부은 주제에, 이제 와서 작가의 길이라. 웃길 만도 했다.


“……웃기죠. 그래도 나, 고등학교 땐 나름 유망주였는데.”


자조적인 말은 참으려 했으나 손을 통해 느껴지는 우시와카의 체온이 자꾸만 솔직하게 만든다. 당신은 여전히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군요. 당신으로 하여금 나를 위로하는 그 능력. 난 그토록이나 그 능력에 보답하고 싶어 했는데.

시라부의 상념을 끊어내듯 우시와카의 낮은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그럼, 잘했었지.”


문득 체육관에서 함께 밭은 숨을 공유하며 얼굴을 마주보고 웃던 시절이 떠올랐다. 네트 앞에서 땀에 젖은 앞머리를 흩날리며 공을 제게 넘기던 시라부. 새터의 자리가 그의 것이 아니었더라면 일찌감치 배구를 접었을지 모른다. 난 네가 내게 넘기는 공이, 그 공이 내 손에 감기는 느낌이, 그게 너무 좋았어.

왜인지 아련하고 또 흐뭇해 보이는 우시와카의 얼굴에 시라부가 어, 왜 과거형이에요? 내 실력 아직 죽지 않았어요. ―하며 장난스레 받아치려는 순간 우시와카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차분히 내려앉았다.

그런데 시라부,


“작가라니. 지금의 너도 멋지네.”


울컥. 그 한 마디에 뭔지 모를 감정이 한데 엉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을 게 뻔했다. 당신은 아무 것도 몰라. 그래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시라부의 잇새에선 이제와 해봤자 소용없는 회한을 함북 담은 헛웃음이 터졌다. 우시와카의 입에서 나온 멋지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신이 아는 난, 그저 한낱 배구라는 취미를 버리고 작가의 길로 전향한 사람이겠지만,

당신이 모르는 난, 


“갑자기 떠난 이유도 책 때문이야?”


배구도 버리고,


“너 옛날부터 글 쓰는 거 좋아했잖아.”


당신도 버린 사람인데.

언젠가 받을 질문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나 급하게 물어올 줄은 몰랐다. 떠난 이유를 알면 당신이 많이 실망할 텐데. 나의 우상이라 해놓고, 당신을 둘러싼 음모를 은폐한 내 비겁함을 알게 되면, 분명 당신은 나를 떠날 텐데.

시라부는 우시와카의 질문을 회피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근데 이 새벽에 뭐하고 있는 거예요? 훈련 시간은 한참 지났잖아요.”
“아, 그게 말이야.”


시라부를 끌어당겨 제 옆에 앉힌 우시와카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 하며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인다. 곧이어 흘러나온 우시와카의 말에 시라부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졌어. 무려 세 번이나.”


완전히 망한 건 아니야. 상비군으로 발탁됐거든. 우시와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 결과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미야모토 감독, 칭찬에 인색한 걸로 유명한 거 알지? 무려 그 감독이 나한테 직접 콜을 보내왔었단 말이야. 날 국가대표로 만들어주겠다고. 만들어줄 수 있다고 자신해서 들어온 거였는데.”


내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매일 체육관을 열고 닫은 건 나였다고. 그만큼이나 열심히 했는데……,

말꼬리가 흐려지는 우시와카의 패망한 모습을 보며 시라부가 아랫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말을 돌린다는 게 오히려 제 상처를 후벼 파는 꼴이 되어버렸다. 당신이 더 나은 실력을 갖고 있었더라도, 더 많은 노력을 했었더라도 당신의 끝은 상비군이었을 거예요. 이미 알고 있던 잔인한 사실을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다만 시라부는 그의 무릎을 토닥이며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새카만 암흑의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리곤,

우상의 꽃. 시라부는 저 자신을 향한 주문과도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저는 우시지마 와카토시라는 제 우상의 해어화(解語花)였다. 아니, 이미 해어화의 자리를 박탈했는지도 모른다. 우시와카를 떠난 그 순간부터 당신의 꽃이라는 자리는 이미 내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해어화라는 별명은 우시와카가 붙여준 것이었다. 훈련이 끝나 둘이서 집으로 가던 도중 그가 그랬다. 넌 나만의 해어화야. 그 말을 하는 우시와카의 입 꼬리 끝에서 주황빛으로 점멸하는 가로등의 불빛이 아름답게 부서졌다. 그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던 시라부는 곧 정신을 부여잡고 해어화의 뜻을 몰라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귀여운 화를 냈다.  


―어, 해어화는 미인이나 기생을 달리 이르는 말이래요. 내가 기생처럼 보여요?
―아니, 무슨 소리야 시라부. 난 단순히 말을 이해하는 꽃이라는 의미에서 한 소리야. 유일하게 나를 이해하는 게 너잖아. 내가 왜 이렇게 배구에 목을 매는지, 너만 이해하잖아. 
―…….
―굳이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면 그건 기생이 아니라 미인일 거야. 미인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칭하는 게 아니라 네가 갖고 있는 재덕을 뜻하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
―…….
―그런데 넌 예뻐서 아름다움도 곧잘 어울리네.


말을 이해하는 꽃. 예쁜 별명을 지어주며 제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따뜻한 미소를 잊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런 당신을 배신했다. 그 죄책감에 차마 당신을 볼 자신이 없어 도망쳤다. 시라부는 제 손등을 덮어오는 우시와카의 큰 손을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언젠가 고백해야 할 일이었다. 분명 당신의 곁으로 돌아온 이유 또한 이것이었는데. 모든 걸 고백하기 위해, 내가 알고 있던 부조리한 사실들을 당신에게 모두 알리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는데.

막상 잔뜩 고통스러운 당신의 얼굴을 보니 당장이고 타올랐던 용기가 흔적도 없이 사그라진다. 파고들어 보면 제 마음이 가벼워지고자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방법을 택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죄라는 건 혼자만 품고 싶기도 하지만 입 밖으로 내어놓아 질타를 받고 싶은 것이기도 하니까. 고작 비난과 질타 따위로 죗값을 치룰 수 있다면 ―하는 이기적인 회피본능이 떠오르는 것이다.

시라부는 짧게 숨을 뱉어내고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우시와카의 정수리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내가 떠난 이유, 당신이 알면 나한테 많이 실망할 거예요.”


시라부의 무거운 목소리에 우시와카가 그의 손등 위로 올려놨던 손을 떼어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맞추자 시라부가 그런 그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몸을 돌려 앉았다.


“실망해도 괜찮아요. 그럴 줄 알고 돌아왔으니까…….”
“…….”
“보기 싫다고 하면 다시 떠날게요. 이해할 수 있어요.”


자조적인 말을 하는 시라부의 모습에 우시와카의 양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감을 잃은 듯한 그의 풀죽은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시와카는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라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다독였다. 괜찮아, 시라부. 얘기해봐.


“……당신은 국가대표가 될 수 없어요.”
“……뭐?”
“어쩌면 앞으로도 평생. 아무리 애를 써도 당신은 국가대표가 될 수 없을 거예요.” 


망설이는 듯 하면서도 단호한 한 마디에 우시와카의 눈빛이 흔들린다.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시라부의 입에선 쉴 틈 없이 말이 터지며 부연 입김이 허공에 아롱거렸다.


“당신은 이미 이 세계에서 스타예요.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배구로 유명한 학교를 졸업했고 당신의 실력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으리만치 출중해요. 모두는 그걸 알아요.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그런 당신의 능력을 모방하고자 당신이 뛰었던 경기 영상을 수도 없이 돌려 보죠.”


눈을 질끈 감고 말을 뱉어내던 시라부가 숨을 고르며 우시와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을 거예요. 당신이 국가대표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는 걸. 그게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
“당신이 잘난 만큼, 동경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당신을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
“그리고 그 사람들은 돈이라는 권력으로 경쟁자를 구석으로 몰아넣었죠.” 
“…….”
“돈을 쥔 권력자가 미야모토 감독, 경쟁자는 당신이에요.”


시라부의 얘기를 들으며 숨소리조차 내뱉지 않았던 우시와카의 눈동자가 검고 깊게 가라앉았다. 목석 마냥 시라부의 하얀 얼굴을 흔들림 없이 쳐다보던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더 자세하게 얘기해봐. 잔뜩 굳은 목소리에 시라부가 이미 말라버린 입술을 혀로 훑어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떠나기 전에 말이에요.”
“응.”
“미야모토 감독님과 우리 감독님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지금 계좌로 넣었다. 이제 우시지마를 넘겨 달라.”


난 처음에 감독님이 돈으로 당신을 판 줄 알고 너무 놀라서 입을 틀어막고 그 자리에서 서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을 팔았다기 보단…, 그냥 당신을 넘겨주는 대가였던 모양이에요.”
“무슨 소리야, 대체.”
“미야모토 감독에겐 아들이 하나 있어요. 당신과 동갑이고, 현직 국가대표예요. 코치 눈엔 보였던 거예요. 당신이 다른 감독에게 넘겨져 훈련을 받는다면 제 아들의 앞길을 막을 유망주라는 걸요. 그래서 당신을 본인 손에 넣고 굴릴 생각을 한 거죠.”
“…….”
“대표선발이라는 게, 실력이 우선이지만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는 거 알잖아요. 감독의 입김이 많이 작용할 수밖에 없어요. 배구에서 가장 힘 있는 감독이 미야모토 감독이지만, 그래서 모두들 그의 소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당신에겐 그 환경이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해요.”
“…….”
“미야모토 감독에게 속해 있는 한, 당신은 절대 국가대표로 발탁될 수 없어요. 당신은 미야모토 감독의 아들의 창창한 앞길을 막을 뿐인 방해물이니까요.” 


우시와카의 잇새로 헛웃음이 터졌다.


“그러니까…, 당신의 인생은 8년 전부터, 미야모토 감독의 소속으로 들어간 그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던 걸지도 몰라요.”


다 알고 있었는데, 차마 당신에게 말할 수 없었어요. 


“당신, 좋아했잖아요.” 


미야모토 감독의 콜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우시와카의 그 순간을 시라부도 함께했다. 평소에 표정변화가 드문 우시와카의 입 꼬리가 치솟는 걸 보며 시라부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저긴 불구덩이예요. 들어가지 말아요. 따위의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이미 저주스러운 그의 결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차마 그를 말릴 수 없던 이유였다.


“모든 걸 다 아는 상황에서 당신의 노력을 멀쩡히 쳐다볼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미안해요.

시라부의 작은 목소리가 새벽바람소리에 스며든다. 볼에 닿는 바람이 차가웠다. 우시와카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계속해서 제 정수리에 닿아있는 걸 안다. 그럼에도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건, 모든 걸 고백했기에 남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왜 미리 말하지 못했을까, 난 왜 그리도 겁쟁이였을까. ―하는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후회 역시도.

한참이 지나도 우시와카의 입에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자, 그 무거운 침묵을 깨며 시라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있는 팀에서는 나오는 게 좋을 거예요. 이 얘기 하려고 돌아왔어요. 할 말은 다 끝났으니까… 저, 갈게요.”


회피라고 비난해도 변명할 수 없었다. 이건 회피가 맞으니까.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고 시라부가 벤치에서 발걸음을 하나 둘 떨어뜨리자, 그 모습을 본 우시와카가 벌떡 일어나며 시라부의 손목을 쥐었다.


“어딜 가.”


시라부가 거의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우시와카를 돌아보았다. 감당할 수 없으리만치 목구멍을 꽉 채우는 건 우시와카를 향한 미안함이었다.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알렸더라면 그가 8년의 시간을 이렇게나 허무하게 버리지 않았을 텐데. 한낱 무능력한 인간이라 시간을 돌릴 수 없는 것이 애석했다.

그런 시라부의 얼굴을 본 우시와카는 당황한 듯이 주춤거렸다. 제가 시라부에게 든 감정은 절대 원망이 아니었다. 이제라도 사실을 알려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 무거운 사실을 알고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설사 그 당시에 제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해도 저는 믿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성공을 좇고 있는 열망에 비해 그러한 사실은 하찮게 느껴질뿐더러 부정하고 싶은 부류였을 테니까. 우시와카는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잡고 있던 시라부의 손목을 놓고 그를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진짜 나랑 안 어울리는 말이긴 한데,”
“…….”
“시라부, 이젠 내가 네 꽃이 될게.”
“…….”
“말 뿐 아니라, 네 마음까지 이해할 수 있는 꽃이 될게.”


막상 말을 뱉어놓고 보니 상당히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분명 진심이었다. 항상 제 말에 귀 기울였을 그를 알기에, 항상 제 마음을 먼저 생각했을 그를 알기에 이번만큼은 제가 그를 이해할 때라고 생각했다. 우시와카는 괜스레 머쓱한 기분에 헛기침을 두어 번 하다가 제 허리춤을 끌어안는 시라부의 온기를 느끼며 그의 뒤통수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넌 내게 언제나 훌륭한 꽃이었어.”
“……선배.”
“그 사실은 지금이라고 해서 변한 게 아니야.”


넌 여전히 아름답고, 내게 있어 언제나 위로가 되는 꽃이다. 우시와카는 시라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알려줘서 고맙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미야모토 감독 밑에서 배운 것도 많아.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리고 이건 네가 미안해야 할 문제가 아니야.”
“그래도…, 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요.”
“넌 내 순수한 열망을 지켜주고 싶었잖아. 그래서 숨긴 거잖아. 어설픈 거짓말보다는 차라리 함구해버린 게 현명했던 거야. 넌 어쩔 수 없었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시라부는 강단 있는 낮은 목소리에 위로를 받고 있었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겁만 가득한 내 회피본능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당신의 이해심에 내가 보답할 수 있죠. 시라부는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그의 모습에 한 쪽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끼며 살짝 눈을 감았다.

우시와카는 그런 시라부의 머리를 더욱 당겨 안으며 그의 머리카락 위로 입술을 묻었다. 넌 항상 내 말을 들어주고 이해하느라 무엇이든 나를 앞서 걱정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원망할 수 있겠어. 되레 그가 떠난 이유가 저 때문이라는 사실이 미안했다. 나만 아니었더라면 너도 배구를 계속 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넌 나만을 위한 꽃이었구나. 정말 나를 생각해주는 아름다운 꽃이었구나.

우시와카는 제 품에서 시라부를 떼어내며 살짝 시선을 내려 그와 눈을 맞췄다. 그러나 시라부는 고개를 푹 숙여 우시와카의 시선을 피했다. 우시와카는 굴하지 않고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고마워.”
“…….”
“다시 내 옆에서 꽃이 되어줘. 분명 위로가 될 거야.”


손가락의 거스러미를 뜯던 시라부의 고개가 살며시 들렸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우상을 버린 저다. 그 아름다운 자리가 저를 받아줄 리 없었다. 시라부의 확신 없는 목소리에도 우시와카는 씨익 웃으며 그의 머리를 장난스레 헤집었다.


“그럼.” 


나만의 해어화(解語花), 이것은 8년이란 공백이 무슨 일로 메워졌든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구름에 가린 달이 살며시 빛을 내며 두 사람 위를 비췄다. 서로의 꽃이 되기로 한 오늘, 그들의 얼굴에 찬란한 빛이 아스라져 반짝였고, 어느새 하나가 된 그림자는 그들의 재회를 환영하듯 달빛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울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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